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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07 08:42
출애굽기 영성노트 31 – 모세의 진 밖 회막 영성(출33장 예배영성3)
 글쓴이 : Ezra
조회 : 6,669  

출애굽기 영성노트 31 – 모세의 진 밖 회막 영성(출33장 예배영성3)
 
 
성막의 이름은 성막(tabernáculo-출26:30) 외에도 장막(출25:9), 증거막(증거궤, 법궤가 있는(민1:53), 성소(출25:8), 법막(대하24:6), 회막(모이는 장소-출29:42) 등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출33:7절의 ‘회막’과 성막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회막과는 서로 다른 것이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생각된다. 왜냐면 회막은 아직 성막이 주어지기 전의, 일시적(임시적) 형태의 천막이었으며 모세가 개인적 결단에 의해 지은 것으로서 또 각기 서로 사용된 재료도 다르므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어진, 그 후에 만든 성막과는 관계가 없으며 일부 외관이나 기능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회막과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든 회막이라 불리운 성막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리해서 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의도는 모세가 만든 회막은 그 나름대로 특별하고 의미 있는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막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번 출애굽기 영성노트에서 살펴 보았지만 아직 회막은 깊이 연구된 바가 없으므로 여기서 잠시 묵상을 하고자 한다.
모세가 만든 회막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간략 요약해 본다.
 
1. 모세가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성막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셔서 만들어진 것이지만(출25:9) 회막은 모세가 개인적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다(출33:7-진 바깥 회막). 하지만 모세가 이미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성막에 관한 말씀을 받은 상태에서 임시로 다른 회막을 지은 것이므로 모세가 지은 회막이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은 성막의 영적 원리를 깨달아 일시적으로라도 그 원리를 실천하기 위해 지었을 것으로는 볼 수 있다.
 
2. 사용된 재료가 다르다. 성막에 사용된 재료가 1)청,자,홍(생명의 주, 만왕의 왕, 고난 당하신 주) 물들인 가는 베실(부활하신 주), 앙장을 짜서 만든 금갈고리(믿는 믿음)와 붉은 물들인 염소털(버림받은 그리스도)로 짠 앙장 2)수양의 가죽으로(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대속의 주) 3)해달의 가죽으로(낮아지신 주) 만든 앙장 등에 비해 모세가 임시로 만든 회막은 일반적 재료로 만들어진 평범한 천막이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예배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실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 토단이든 돌단이든(출-토단의 영성 참조), 예배처소의 외형이나 조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만날 예배처소가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3. 하나님께 기도, 예배 등 영적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다
 
1) 모세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해 영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으며 그로인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고 예배하는 공간이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잠시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2) 그런 거룩한 공간은 죄된 백성들이 사는 지나치게 인간 냄새나는 속세적 시끄런 공간(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이 그것을 음란하게 섬긴,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멸절시키려 하셨던..)과 구별된, 예수님께서 그런 장소를 찾으신 것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의 구름과 우뢰, 번개불 등 을 보면서 자신들이 너무나 큰 죄인들이라 하나님이 직접 백성들에게 말하시면 백성들이 죽을 것이 두려워 하나님이 말씀을 직접 못하시게 모세가 하나님과(시내산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나 직접 말씀을 받고 그 받은 말씀을 자신들에게 다시 전해 주기를 원했고(간접적 언약, 간접적 만남 희망- 이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사람들, 소명, 사명자들로 인해 진행된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간접적으로라도 하나님 은혜로 사는 것도 감사하고 그런 직접적으로 만나는 사람의 말을 들으라), 
 
4)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한 이후에 모세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올라가도록 하시며 하나님 자신은 직접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이스라엘의 죄와 부딛혀 이스라엘을 진멸할 것이고 모세는 여전히 그렇지 않도록 중보기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죄는 용서하시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런 황당한 백성과 직접적으로 함께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중보기도와 예배는 그런 직접 관계를 회복(restaurar) 하는 사역이며(내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라), 그럴지라도 간접적인 만남(내 등은 보되 얼굴을 보지는 못하리라)이 불가피하며 죄인 인간에게는 이런 지경까지 간 인간에게는 그럴지라도 오히려 그것도 더 좋은 감사해야 할 이유일 수도 있다.(하나님께서 그만큼 인간의 나쁨으로 인해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비와 인내, 성실로  도우실 것이므로)
 
5) 또 비록 그런 일로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죽을 위기에 있었을지라도 모세가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하늘의 명부에서 지워 주실지라도(죽음) 백성들은 살려 달라고 하는 중보기도 사역 덕택에 백성들과 아론이 살아 난 것을 그들이 기억해서 앞으로 자신의 사역중 중요한 것으로 등장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을 택했을 것이다(개인적 조용한 기도, 묵상, 예배와 중보사역 장소의 필요).
 
6) 이런 회막의 기도, 예배는 겸손, 회개, 대가 지불도 없이 무조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정말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곳에서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삶을 갖기를 진 밖 멀리 떨어진 곳까지 기쁜 마음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누구라도 갈 수 있도록 했다. – 예배는 의무가 아닌 특권이다. 예배하는 삶, 모세는 기도와 예배의 사람. 이것이 모세가 진정한 신앙의 모범적 인물임을 의미하는 가장 귀한 증거.
 
7)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구름기둥을 내려(임재의 증거) 회막문에 서며(기다리셨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직접 말씀해 주셨다(대면). 이런 과정을 통해 모세는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바로 인도할 수 있었다(신앙 지도자의 개인적 직접 예배의 필요성. 그런 점을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며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8) 모세가 회막에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회막문에 구름 기둥을 세우시고 친구처럼 대면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도 간접적으로나마 다 일어나 각기 자기 천막문(장막문)에 서서 경배했다. – 간접적 예배의 형태와 신앙 없는 백성에 대한 모범. 가족들 이웃들 가운데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가 먼저 참된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9) 청년 여호수아는 모세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고 난 후에도 거기 엎드려 있었다. 이것은 여호수아도 역시 이미 이때부터 영적으로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 예배하는 기본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지도자(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는 결코 겉모습 만으로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10) 이런 형태의 개인적 예배는 모세가 율법을 받고 성막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과의 개인적, 직접적 만남의 장소로서 약 일년간 계속 되었다. – 중요한 일이 있을수록 더 기도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4. 전술한 이런 점들에서 볼 때 평신도들도 그렇지만 최소한 그들의 영적 지도자는 비록 성막도 없고 상황도 어려운 시절이라도 개인적으로라도 하나님과 직접 자신만의 장소에서 개인적으로라도 기도와 예배하는 생활에 충실해야 할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하면 그러한 점을 바라보는 백성들이 격려 받고 힘을 얻어 간접적으로 있는 곳에서라도 그러한 영적 모범의 지도자를 바라보면서 간접적으로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5. 후에 성막이 건축되고나서 하나님의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의 진 중앙에 친히 항상 머무르시고 인도하시면서 이러한 간접적 예배형태가 직접 예배 형태(중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다시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고 성막 제도(그 후에는 성전제도) 폐지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교회 시대가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교회는 성막 시절보다는, 모세시절에 모세가 개인적으로 만들어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았던 회막시절(간접예배 형태)로 돌아간 점도 없지 않다.
 
후대의 이스라엘의 성전 역시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 다윗이 드리려 했던 것이나 하나님은 거부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은 준비만 하고 솔로몬에게 그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 다만 받으시되 분명한 계약의 갱신과 함께 받으셨다. 만일 솔로몬을 포함한 예배자들이 계약을 깨뜨리면 무효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성전 봉헌과 함께 이어 받은 모든 축복 이후에 정작 솔로몬 자신이 그것은 먼저 깨뜨렸다. 받을 축복 다 받고 챙기고 실컷 누린 후에 그 인간이 배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 덕택에 후손들에게 저주가 임하게 되었다. 즉, 성전 역시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지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때의 회당 역시 하나님의 명령과 직접 관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셨거나 주신 것은 역사상 성막과 오늘의 성령의 피조물인 교회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친구처럼 말씀도 나누는 복을 받을 수 있다면 가장 원하는 바이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고 인간은 그렇지 못한 반대의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또 그래서 설령 완전에 거의 가깝게 도달할정도로 그렇게 할 수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다만 인간일 뿐이지 하나님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본질상 간접적(선악과가 필요한)일 수 밖에 없다. 직접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무궁하신 은혜와 성실로 돕기 원하시는 그분으로부터의 무한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을 살고자 스스로 노력도 하고 또 그런 부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일이며 그 분을 인간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그대로의 처지, 주어진 작은 것에서부터 불평, 배신하지 않고 늘 감사, 예배하는 삶, 예배의 결과인 “은총에 의한” 변화함을 힘입어(내가 먼저 은혜를 경험해 봐야 은혜로 살고 은혜로 인도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예배하는 삶을 통해 그런 삶의 위대함, 중요성을 깨닫고 본 받을 수 있도록 예배하는 모범을 보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득이 간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하나님께는 간접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적 부분인 한, 인간에게는 직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며, 직접과 같은 본질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도마에게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이유에 있다 본다. 아름다운 것은 믿음으로 사는 일이다(히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우리는 그 모범을 모세의 진 밖 회막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아무리 훌륭한 모세 일지라도 모세에게 그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회막을 만들고 개인적으로라도 기도, 예배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런 자들의 반열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명령, 의무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했다. 출애굽기에 이런 본질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여전히 배울게 있는 것이다.
 
연약하고 제한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수하게 그 분 때문에 기쁘고 감사한 삶, 예배하는 삶(사실은 예배가 원인이고 그런 삶은 예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웃을 돕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귀한 특권이며 하나님도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시고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천사도 흠모하는 삶). 출애굽기를 지나 레위기로 들어 오면서 이런 예배하는 삶의 위용을 새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한다. 예배하는 삶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는 삶은 없다. 토단, 회막을 만들어라도 있는 그대로의 처지에서 신령과(하나님 편에서의 도움) 진정(인간편에서의 섬김)으로 예배하는 삶, 그런 예배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으로 깨닫고 변화하게 하며 감사함으로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