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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6-25 05:51
창세기 영성노트 29 – 성경적 바른 남녀(부부) 관계를 배우는 영성
 글쓴이 : Ezra
조회 : 5,017  

창세기 영성노트 29 – 성경적 바른 남녀 관계를 배우는 영성

부끄럽게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마치 여성이 남성의 종속품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이유가 타락한 아담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분명하게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크게 더 할 것이며 “남편을 섬기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구약에서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예 여성과 어린 아이들은 인원 수에 제외했으며 신약 성경에서도 여러 부분에서, 예를 들면 오천명을 먹이시는 광야 이적에 여자는 제외 된 것,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velo)을 쓰며 남을 가르치는 것을 금할 것 등을 기록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하나님도, 성경도 남성권위주의(machismo)를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서적이라고 한다. 불행한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소위 민주주의 시대라는 오늘날까지도 여성은 가정과 직장, 사회 등에서 대부분 동일한 대우를 실제적으로 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성경은 남녀 차별을 말씀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왜냐면 최소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르침의 내용으로 볼 때(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 그 시대의 상황 등이 남성 위주의 시대였고 그로인해 어느정도 여성의 역할이 위축되어 있다해도) 본질적으로 여성 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당시에 누가복음이 언급하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예수님의 주변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이상으로 삶과 사역을 섬겼던 훌륭한 여성들이 있었음에도 당시의 권위적 남성위주적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런 훌륭한 신앙의 여인들을 제자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행적이 오히려 남녀의 차별을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영적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원하시던 예수님을 오해하고 의문시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 누가의 이 부분에 대한 배려로 더 많은 여성들의 행적을 상세히 볼 수 있고 거기에는 남녀간 성적 차별이 없으며(여성들을 위한 복음- 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특징) 이 문제를 초월해서 그가 누구든지(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행위가 모범이면 그것을 밝히 드러내어 기록한 것이다.  묵상 결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본다. 

1. 창세기 3:16절에서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라고 하나님께서 여자(이브)에게 죄의 결과 분명 남자를 섬기며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기 때문도, 여자가 한 일이 더 괘씸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도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자존심에 가득찬 핑계(내가 왜 먹었느냐고요? 저 뱀이 날 유혹해서 그런 것일 뿐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의 에덴동산에 그런 간사한 뱀을 허락해 주셨는지 그래서 이렇게 나까지도 유혹에 빠져 넘어지게 만든…)만 대는 영적 상태를 볼 때 앞으로 “그렇게 될 것” 임을 알려 주셨을 뿐이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까지도 정말 신사적으로 인내하시면서 가르쳐 주심에도 불구하고(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대로 인간은 그 날 죽었어야 했다) 인간이 그 결과가 자신에게 나빠서(감정상)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남성주의자로서 화나고 분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사실 죽고 자신은 새롭게 낳은 생명을 가슴에 안아보고 기르는 것은 그래도 당장 죽은 것보다는 오히려 그나마 자신의 생명의 간접적 연속을 나름대로 즐거움을 느껴 볼 수 있는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또 에덴의 모든 일이 모두 여자 때문에 다 망가져 버렸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왜냐면 남자가(아담이) 이미 이전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열매를 먹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면서도 하나님보다 여자를 더 아껴서(?)- 받아 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연한 남자의 실패이다. 그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거역한 실패이며 결코 본질상 여자의 그것에 비해 가볍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여자 편에서도 비록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열매를 보니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워서 그래서 먹고 싶었을지라도 조금이라도 남편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어도 먼저 먹기 전에 “이것을 먹고자 하는데 당신은(아담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라도보고(최소한 자신이 알면서도 그렇게 해 버림으로써 나중에 남편에게 그런 실망감을 안겨주는 여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결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 경우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러나 만일 남편에게 그렇게 했다면 남편이 물론 그것을 찬성했을리 없겠지만 최소한 그런 문제의 이해와 함께 하는 결정에 대해 큰 도움 되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먼저 행동해 놓고(저질러 놓고) 나중에 더 대가를 크게 지불할지라도 대신,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만 하는 일방적인 인물이었기에 그랬으리라. 그것은 성격일 뿐 남녀의 차는 아니라 본다.

그런것을 모두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남녀의 차이를)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런 벌을 내리셨다고 보기도 힘들다. 왜냐면 그런 창조하실 때부터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을 전혀 모르고 그렇게 에덴동산 중앙에 금단의 열매를 두고 먹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높은 차원에서 그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 근거는 아담과 이브가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고 나서 하나님 관계에 있어서 취한 관계를 보면 무엇이 그들의 더 큰, 그러나 숨겨져 있던, 진정한 문제였는 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렇게 먹으면 정녕 그 날로 죽으리라는 말을 알면서도 먹는 죄를 짓고나서 무화과 나무 그늘 속에 숨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셨을 때 그들은 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렇게 숨었노라고 대답한 것이 그 점을 말해 준다. 전에는 얼마든지 벗고서도 아무 문제가 전혀 없었지만 이제와서 갑자기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은 긍정적 사랑과 자유의 신뢰의 관계가 아닌, 부정적인 불순종, 자존심과 두려움의 관계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존심과 두려움은 분명 죄의 첫 결과인 죄책(consecuencia de pecado)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정한 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피조물의 죽음은 진정 하나님과의 사랑과 섬김의 관계의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단순한 육신적 죽음 이상의 본질이며 영원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인간을 로봇처럼만들지 않으시고 그 인간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닌 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선악과나무 열매)를 주셨고 그 사람이 긍정적 사랑의 의미에서 양심적으로 좋은 것을 선택하고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소한 지켜져야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어서의 관계 정립을 위한 전제적 필수조건인데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영욕을 위해(하나님처럼 되고자) 불순종을 택한 것(자범죄-고의적)이고 그것은 아담이나 이브를 막론하고(그들의 성이 무엇이든) 두 사람 모두 다 본질적으로 판을 깨는 큰 죄인임을 보여 준다.

왜  하나님의 유일한 부탁(명령-선악과)을 알고도 범한 죄인(실수가 아닌 의도적 죄) 인간은 어떤 면으로든 다른 면에서 기타의 문제들 때문에 선해 질 수 없다. 죄는 다만 죄일 뿐이다. 그런 점을 무시하고 다만 남-여 사이에 누구 죄가 더 크냐는 식으로 죄를 논하는 것은 도둑이 제발져려 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2. 더군다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을 네가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그것은 대답도 안하고 다만 핑계를 대며 그 책임을 여자와 하나님께 돌리는(“당신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더 큰 비겁함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여자보다 작은 죄가 아니다. “만일 제가 먹었습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봐요. 참 죄송합니다. 당신 선하신 뜻대로 처분해 주십시오. 다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이실직고 회개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렇지 않아도 아시고 구원사역을 시작해(창3:15) 주실 것인데 또 다른 차원에서의 피안의 해결책이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하나님과 사람(아담)사이의 영적인 관계가 그렇게까지 극한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담 부부 사이의 이런 대화가 끝난 후 하나님의 벌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즉,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자 지불해야 할 나름대로 적합한(?) 벌을 내려 주신 것이다. 남자(아담)에게는 땅이 소산을 적게 낼 것이며 평생 땀을 흘리고 일하는 수고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크게 하실 것이며 남자를 섬기며 살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남자를 섬기며 산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에덴에서처럼 항상 함께 하시며 영적 교제를 하시고 각 자의 필요를 채워 주심(공급), 격려, 인도, 지혜, 보호, 능력주심, 성취하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함 등의 성령의 사역의 특권으로 축복해 주시던 복이 없어짐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가 거의 동물 차원으로 더 타락할 것 임을 예언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앞으로는 그 결과 서로 일시적으로 좋을 때(먹고, 놀고, 자식 낳고.. 히히하하..)는 좋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간 존중이 없고 상황이 나빠질 때는 실컷 서로를 원망하고 책임 회피하고 서로 이기적으로 이용해서 자기가 원하는 일방통행식 방법으로(아니면 상대방을 이길 수 없서 죽지 못해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사는 부정, 소극적으로) 살고자 하는 부정적, 비 효과, 비 생산적 슬픈 관계가 되어 서로간 괴로움, 고통을 당하게 될 것 임을 알려 주신 것이다. 졸지에 영적 존재가 육이 되고 이타적 사랑의 관계가 내심 이기적이며 자만심(pride)에 빠진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형적인 슬픔이 아닐 수 없다.

3. 한 마디로, 무엇이 문제인가?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것은 죽음이며 허무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 피조물로서 바른 태도가 아니며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적 사랑의 대상으로서 창조되었으나 연약함과 한계를 가진 육신이기에 연약한 부분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가며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며 사랑의 대상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4. 창1장에서의 기술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함께(동일하게) 축복”해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뜻이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아담은 먼저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그 후에 아담의 몸을 통해(같은 재료로) 또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결국 여자도 동일하신 선하신 뜻으로 만드신 것이다. 1장과 2장의 인간 창조의 과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중점이 다르기에 다르게 보일 뿐 두 장을 함께 종합해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1:26) 그들을 함께 축복해 주신 것이다(1:27). 비록 여자를 후에 창조하셨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그의 창조와 축복의 효력은 본질상 동일하다. 그것으로 인해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지 못한 것으로 비하하고 종처럼 남자만 섬겨야 한다는 것은 이 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영적 핵심을 크게 오해하면서 맺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5. 본래 하나님의 뜻이 서로 평등하고 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원했음에도 그렇지 못한 것은 분명 죄의 결과(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잘못의 결과)일 뿐이며 본래 있었으나 상실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므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 강림에 의한 영적 회복)로 영적으로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적어도 그래야 옳은 것이지, 이런 논리가 결코 남성우월주의 편향적 사회(?)에 대한 무슨 대단한 혁명적 논리처럼 생각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밝혀진 하나님의 뜻을 경시하는 또 하나의 극단일 것이다.


6. 또 한 부부가 정말 서로 사랑하면 누가 더 우월하고 능력있느냐, 서로간 누구에세 더 큰 명분과 이득이 있느냐 없느냐를 완전 초월해서 오히려 자신보다 상대방을 낫게 여기며 자신을 겸비하여 오히려 섬기며 지체를 세워가는 사랑을 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결코 상대방 보다 우월하기 때문도 아니고 비천하기 때문도 아니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방이 기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뻐서 좋아서 섬기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섬기면 그만큼 또 좋은 것으로 돌아 온다. 적어도 자신은 상대방에 대한 최대의 존중과 섬김의 자세가 되어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받고 실천하며 충만히 느끼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게 더욱 노력해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충분히 설명 요약된 것이며 본제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므로 요약하고자 한다.

성 문제를 초월해서 삼위일체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부자 관계가 그런 것이라 보여 진다. 아들이 스스로 철저하게 자신을 겸비하여 아버지를 섬긴다. 다르게 할 수 없어서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스스로 겸비하고 섬김의 자리로 내려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삶(구속사역)을 죽기까지 충성하신다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사랑이 너무 아름답고 완전해서 아버지의 모든 권위와 능력, 그리고 장차 아들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아들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도록 모든 것을 다 부여(entrega) 하시며 우리가 그런 아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기쁨이 충만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차원에서 다(빌2:4-11). 신앙 안에서는 진정 너와 내가 아닌, 철저한 하나(사랑하고 섬기는)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동반자(el companerismo)적 사역의 원리가 된다. 동반자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 지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이미 돕고 있는 사람이다. 요청이 따로 필요가 없다. 이미 하나이고 함께 모든 것을 나누고 때문이다.

성도와 하나님의 교제 관계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교제(comunión)는 상황과 자신의 뜻을 초월하며 아들이 연합과 섬김의 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듯이 영으로 하나 된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홀로 두지 아니하신다(요8:29) 사랑하므로 모든 것을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으며 종이 아니고 친구, 친구 중에도 가장 좋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친구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을 초월한 사랑의 최고의 모델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배운다. 또 하나님이 먼저 유일한 교제와 경배의 대상이어야 안에서 부부가 되어야 부부생활에도 문제가 없어지고 이처럼 대신관계가 바로 되어야 대인관계도 완성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개인-가정-이웃-세계관 완성의 기초가 된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인류 첫 부부로서 미래 모든 부부들의 모형 아담 부부에게 원하셨던 것은 바로 이런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된 아담과 이브는 부부로서 아직 영적 미성숙 상태에 있었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이르기도 전에 뱀의(마귀의) 시험부터 받아 본래적 엄청난 축복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적 축복을 회복하면 남녀가 평등해 질 뿐만 아니라 진정 사랑으로 연합하게 되어 누가 더 우월하냐는 질문이 서로 연합하고 도와 지체를 세우면서 함께 하나님을 경배, 교제하는 백성으로 성숙해 가기 때문에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사역도 가능해 진다.

이런 의미에서의 바른 부부관계는 모든 능력사역의 본질적 기초이며 사단이 싫어하고 가장 집중 공략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일들이 이렇게 재정립된 부부 관계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그래서 최선 다해 수단방법 초월해서 유혹하고 속여 그릇된 것들로 가득차게 만들어 서로 싸우게 하고 결국은 함께 하나님 경배함조차 불 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오늘의 가정파괴- 부부관계 붕괴의 문제인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정 파괴로 인해 사단이 원하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자녀, 이웃관계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것이 그의 중요한 전략적 목표이기 때문에 욥에 대한 특별한 개인적 시험 후엔 부부간의 시험이 있을 것도 당연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연약, 한계적인 육신적 인간 자신의 약점, 세상이 악하며 초자연적 원수 사단의 유혹의 능력 때문에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완전한 극복은 불가하며 부득이 전지, 전능하시며 타락한 아담 시대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가정을 도와 오셨고 또 돕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물론, 가정 차원에서 어려움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말씀 기도 성령 인도) 또 성을 초월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또 이웃(상대방)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함이 본질이다.

만일 여자(이브)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남편에게 물어 보기도 전에(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먼저 하나님께 물어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 이 뱀이 지금 내게 내가 당신이 금하신 열매를 먹어도 죽지도 않을 것이고 또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당신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생각이 없답니다. 이 놈이 무슨 능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유혹이 되네요. 이렇게 저는 약하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저의 연약함을 도와 주옵소서.” 라고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상태였다면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어쩌다가 그 순간에 유혹에 푹 빠져서 혹 그것을 뭘 모르고 먹어 버렸더라도(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죽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먼저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하며 죄의 대가를 달게 받을 것이며 어디서든, 설령 지옥에서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살겠다는 마지막 요나의 기도의 모범을 보였다면, 적어도 그런 성숙함이 있었더라면 남편 아담까지도 감동시키고 한 수 배움을 주었을 것이고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인간의 또 진정한 적은 자신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인 것이다.

7. 끝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돌리기 위해 존재한다. 자신의 뼈요 살이라고 감탄하며 죽도록(?) 사랑했던 아내도, 에덴동산도 모든 것이 너무 좋아서 두 남녀가 서로 벌거벗고 살아도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전혀 부족함 없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살던 낙원 에덴도 결코 하나님 보다 그것을 더 섬기면 그것이 타락의 올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껏 감사하고 즐겨도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서 감사, 경배, 순종하면서(어떤 경우에도 대신관계는 확실하게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