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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7 14:33
요한계시록 영성노트 6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한 묵상
 글쓴이 : Ezra
조회 : 1,103  
요한계시록 영성노트 6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한 묵상


당시 소아시아(좀 더 확장된 지역 개념으로 보면)에는 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꼭 일곱 교회들만 기록되었을까? 그 교회들의 구속사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어떤 역사성(구원사), 상징성, 순수성, 영적대결의 승리를 위한 교훈..  등의 여러 특징들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본문에서 그 상황들,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하는 점에 대해 더 묵상해 보고자 한다.

1. 아마 7이라는 숫자는 당시 그 지역의 일곱 교회들을 가리키지만 나아가 또한 각 교회 같은 그런 모든 다른 교회들을 포함하는 거룩한 상징(하나님의 수3과 세상 수 4)적 의도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성경에 7은 완전, 거룩함을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약463회;- 스트롱사전). 요한계시록에서도 역시 같은 의미로 상당히 많이(16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7교회(1:4), 7영(1:4), 7금촛대(1:12), 7별(1:16,20), 7사자(1:20), 7등불(4:5), 7봉인(5:1), 7우뢰(10:4), 7머리(붉은 용의12:3), 7나팔재앙(15:1), 7대접재앙(16:1), 7천사(17:1), 7짐승의 머리(17:3), 7면류관(붉은 용의 -12:3), 7산(17:9), 7왕(17:10) 등 약16가지 경우로 사용되었다.  계시록에서  7수로 구성하는 것은 구약의 유대 전통 랍비문학의 전형적 표현 방법으로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2. 일곱 수가 인재앙, 나팔재앙, 대접재앙 등에서 내용과 영적  패턴이 동시에 유사하게 ‘반복, 심화’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반복될수록 의미상 더 중요성도 갖게 된다. 그러나 일곱 수는 심지어는 사단의 무리들도 역시 7수를 모방(12:3절 붉은 용의 일곱 머리 7왕관, 17:3절 붉은 짐승의 일곱 머리) 하고 나오므로(사탄은 모방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신자를 속이는 것만 잘하는.. ^^) 성도에게는 거룩한 수 이지만 그래서 그것이 사단이 흉내내는 7 수 인지 아닌지 살펴 주의해야 할 ‘수’ 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왕관은 디아데마, 면류관(승리자에게 수여하는 관)은 스테파노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관은 디아데마타(19:12- 많은 관들), 사단의 면류관도 디아데마(12:3)이므로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경우 19:12절에서 면류관이 많은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볼 때는 디아데마, 그러나 왕위를 버리고 성육신하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역할을 생각하면 스데파노스로 볼 수도 있어서 많은 관들이라 표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에서 보면 일곱 교회들은 각각 에베소교회(초대교회, 사도, 속사도시대-세속신학 개입 시대) – 서머나교회(박해시대, 교부시대, 근본적 진리수호시대) – 버가모교회(제국교회 시대-교권주의, 유물주의 시대) – 두아디라교회(교황권시대) – 사데교회(종교개혁시대, 지식적 말씀) – 빌라델비아(교회부흥과 세계선교확장시대) – 라오디게아교회(현대교회) 등으로 나누어  영적으로 역사를 일곱 시대로 나누어 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해석에 다른 관점(역사주의적 전천년설 성경 해석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통합과 합동측이 서로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갖고 있고, 때때로 이단시비, 또는 신학논쟁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비판하는 입장의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 각 시대들이 각기 다른 특징을 띠고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인도하실 때에 각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상황과 특정적 필요 등에 따라 더 구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역사(구원사)의 원리만 말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실제 각 기 다른 시대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인도의 특징을 오히려 구체, 실제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도 시대, 각 시대 심지어는 자주 세대들을 따라 비록 본질은 변치 않을지라도 새롭게 갱신되며 발전되는 것과 같은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역사관, 교육 등(이 두 가지는 인류 지속적 삶을 위한 결정적 도구들이긴 하지만)을 절대화하면.. 때로는 오히려 인간 사고의 한계를 넘어 허용, 인도(여호수아 시대에 해를 멈추시고 시간을 멈추심, 히스기야의 죽을 병을 낫게 해주심 등)하시는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인도하심의 자유를 속단, 제한, 오판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없지 않고 심지어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같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종말의 때와 현상들에 대한 구약 모든 예언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종말에 일어날 표적들까지 포함해서 이미 거의 다 성취되었음에도 계시록6장의 순교한 영혼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심판은 아직 연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최종 심판이 계속 연기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 자신의 최종 심판을 위한 의로우심의 성취 외에도, 아마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최후, 최선의 기회를 주시는, 그리고 성도 편에서도 육신적 의의 영역을 뛰어 넘어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게 되는 성숙하고 충만한 수가 다 차기까지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일을 위해 기도의 향의 양을 채워야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종말재앙을 내리시므로 종말을 맞는 신앙의 태도는 정말 깨어 기도하고 그 떄가 언제이든 주어진 오늘에 신앙의 최선을 다하는 거룩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고 더 높다고 말씀하신다(사55:8). 아마 아직도 우리가 이 악한 세상을 위해 더 인내, 기도하며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선교 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롬3:23-24)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그것은 환란의 시기를 맞고 있는 교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최종 공의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역설적 감사와 기쁨의 소망이 될 수도 있다 생각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으며 풍성하신 가를 교회가 영적으로 깨닫고 누리는 신앙의 영적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 더 이상 죄짓지 않고 사는 것(축소개념 영성) 보다 더 소중하고 귀함을 보여준다. 

4. 일곱 수가 나타내는 거룩, 완전의 구속사적 상징성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이 수는 각 교회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생긴 초대교회로부터 현대교회 시대까지 하나님의 거룩, 완전한 연대기적 구속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각 교회들의 특징적인, 그러나 오히려 본질에 걸리는, 문제의 영적 패턴들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시대(역사)와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고 그것들이 바로되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 질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도 보인다. 초대교회시대-박해시대-제국시대(종교화)-교황권시대(교회타락)-종교개혁시대(신학화)-복음운동과 교회 부흥, 선교시대- 그 후 현대교회(세속화) 시대 등은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 구속사를 위해 이끌어 가시며 교회를 교육, 훈련하시면서 사용해 가시는, 관계 속에서의 파노라마같은 일련의 교육적 훈련 과정이다. 그런 관계속에서 가지된 성도(또는 교회)들이 참 포도나무의 줄기되신 주님께 얼마나 잘 붙어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런 문제들이 하나도 없이 살고 싶지만.. 초자연적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세상을 헤메는 종말적 상황에서  좋은 뜻으로 사람들에게 선교를 해도 많은 경우 그들이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해서 오히려 오해, 잘못 해석해서 고난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우리같이 강팍한 사람들도 변화,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마지막까지 그들에게도 임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육신의 옷을 입고 사는 날 동안 어쩌면 우리는 이런 과정들 속에서 주님의 인내를 배워가며 예수님의 성품에 이르도록 더 배우고 성숙해 가며 사는 것 같다.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아예 들을 기회조차 없는(그런걸 바로 알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못 듣는) 사람들이 종말이 올수록 더 강팍해 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으로 섬기는 특권적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기쁘고 깊이 감사하며 끝까지 충성하는 사역에 임해야 할 것이다.

5. 주님께로부터 받은 첫사랑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에베소교회) 전술한 섬김의 마음으로 이 시대를 대해야 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요한계시록의 첫 장에서부터 이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계시고 그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사명이 주어진 교회 지체로 불러 주셨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것이 여기에 다 있다. 아울러 삼위일체 하나님의 최종 결론은 교회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교회로 삼아 지체된 우리가 그렇게 마지막까지 최선 다해 살도록 격려해 주신다. 이 사역을 위해 주님이 우리와 함꼐 해 주신다(마28:20). 그 분의 얼굴과 눈, 입술, 음성,가슴의 금띠와 손과 발은 모두 우리를 향해 있고 심지어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을 오른 손에 잡으시고 인도해 주시고 계신다(게1:12-16). 우리가 그 은혜를 꺠닫고 바로 주님과 확실하게 붙어 있고 동행하기만 하면 그것은 이미 긍정적으로 다 주어져 있고 그것만 바로 깨달으면 이후의 상황들도 염려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설령 어떻게 된들(주님께서 그것도 막으시고 선히 인도해 주시겠지만) 결국 우린 주님을 최선 다해 섬긴 건데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사실은 이런 점이 소아시아교회가 일곱이냐 아니냐는 외형보다 더 본질일 것이다.

6.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등으로 연결되는 원형의 도로는 로마와 기타 세계를 연결하는 군사, 경제, 행정, 종교 전파를 위한 첫 입구인(교회로 볼 때는 마지막 입구^^) 교통로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일곱 교회들이 그곳에 있는 것의 의미는 당시 최대의 우상숭배 제국인 로마종교의  황제숭배, 이에 대치적인 영적 최고 정예인 초대교회들 사이의 마지막 영적 대치, 영적전투를 위한 의미로 보아는 점에서 이 일곱교회가 처한 상황은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것저것, 다른 것들로  바쁘고 세상 열락과 원수들의 속임수에 빠져 현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영적 의미도 깨닫지 못한 채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의 위협과 현재적 권세에 영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있거나 심지어는 최악의 경우, 주님께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 버리거나(에베소교회), 친히 가셔서 주님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는 일이 벌어질 것(버가모교회), 기타 최악의 상황까지도(두아디라교회) 포함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다. 중략.. 

마지막 때는 되었는데 진정한 선교는 언제 할 것인가? 로마 복음화를 위해 영적전쟁을 치는 준비는 되어 있기나 한 것인가? 언제 주님 원하시는대로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암담하다. 그러나 계속 엄중 경고와 함께 돌이키라 하시는 말씀을 거절한다면 그들이 먼저 주님의 가장 엄중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의 구원사는 계속 진행, 반복, 심화되어가는 일종의 일정한 영적 전쟁의 현실을 알려 주고 경고하면서 동시에 그 전쟁의 패턴(수정이 시급한)의 본질을 보여 준다. 어쩌면 이런 패턴이 본질이고 다른 기타의 것들은 차후 문제일 것이다. 인재앙, 나팔재앙, 대접재앙들은 결코 서로 다른 재앙들이 아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으나 그것을 끝까지 회개하고 고치지 않기 때문에 반복되어(삼세번까지^^)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24:14절에서의 주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고 말씀하신 같은 주님이시며 마지막으로는 11장의 두 증인들의 모습에서 전도, 최소한 마지막 선포의 의미에서 그 점이 더 리얼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믿는 마지막까지 복음 선교하는 믿음이 종말시대의 교회들에게 있다면 한 영혼이라도 더 돌아오시를 원하실 주님께 가장 기쁜, 주님이 기대하실 소식일 것이고 그것도 역시 심판이 지연될 이유들 중에 가장 근거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7. 그런 점에서 그런 영적 문제들을 일으키는 원인인, 원인들의 또 다른 유형, 패턴(pattern, framework structure)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일어나고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종말의 때의 논쟁에 앞서 먼저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런 패턴에 영적 소경됨, 형식적 종교생활, 인본주의적 신앙, 인내부족, 열심부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들로 7교회들에 순위를 정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각 교회는 교회사의 각 시대를 나타낸다는데 실제로는 순서대로 매겨 보니 그 순위들이 시대마다 잘한 것 못한 특징들이 들쭉 날쭉.. 엉망이 되고 만다. 역시 시대적 부분적 특징도 중요하지만 영적 요소들로, 또 구원사 전체 - 그 본질은 결코 변치 않으면서 진행되는- 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영이 육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주님을 바로 섬기지도 못하고 쓰임도 못받고 역사적으로도 발전되며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오랜 중세 교황독재시대니, 그러다가 끝내는 개혁이니, 심지어는 개혁자들도 뭔가 아직 부족한 채로 나중에는 실수와 타락을 하게되는..  이런 것들도 있게 된다. 결국 개혁은 있지만 전술한 면으로 보면 크게 본질적 발전은 없다. 어쩔까나.. 다시 겸손히 주님의 발 앞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하나님의 끝없으신 자비와 인내가 아니고는 그들이나 우리나 오늘조차 없는 것이 현실인데.

성경에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24:36절) 하셨다. 휴거가 언제 있든, 심지어는 일부 극단 론자들의 주장 처럼 없든지, 환란을 통과하든지 아니든지, 우리는 다만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주님이 말씀해 주신 본질적인 주 안에서 할 일을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된다. 사도행전 1:8절에 의하면 성령님의 권세를 받아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임시 지상선교부인 주님의 교회가 종말 가까운 이 시대에 고난과 박해 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해야 할 이유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처럼 선교이기 때문이다. 나혼자 구원받고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 교회라면..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아직도 자신의 방법, 자신의 기준(나의 의, 그것은 거의가 다 사단이 애용하는 옛 사람, 육신적 방법들을 그대로 쓰면서)으로 섬기는 것은 이미 뭔가 잘못된 일이다. 정말 주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매우 이기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탄과 세상은 그런 것을 보고 좋아하며 또 조롱한다. 교회는 내가 예수님의 모델처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도록 자신의 안위가 아닌, 타인들의 구원과 주 안에서의 풍성한 삶이 있기를 지향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미 교회가 아닌 것이고, 더 이상 그런 교회는 이땅에 존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8. 감사하게도,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당시 이미 바울이 기초를 놓고 후에 요한을 비롯한 최고 정예 지도자들이 결성하여 만들어진 비교적 최고의 양질의 교회였다. 그들이 이 지역에 교회를 세웠고 사역을 해왔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로마를 선교해야 할 입장에 있지만 그런데 정작 아직도 각 교회 자체 문제들에 매여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하면서 곧 임박한 종말의 대환란이 예고된 메시지를 받고 있다. 지금 그것이 좋은 모범과 함께 이루어지기만 하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구원사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시점인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수준과 태도는 그렇지 못하고 다른 육신적 삶에 매여 그런 거룩한, 의미 있는 목표를 위해서는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차라리 어려워도 깨어 고칠 것은 고치고, 또 행할 일은 행하면서 주님 영광을 위해 유익하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교회에 말씀하고 계신다. 이 시점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이 있다(2:7..). 그것은 오늘날 임박한 종말 시대를 맞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같은 교훈을 준다. 다시 본질이다. 본질로 돌아가 주 안에서.. 자신을 바로 깨닫고 새속화, 원수의 극한적 시험과 도전 가운데서도 마지막으로 주님 영광을 위해, 또 마지막 한 생명이라도 더 구령하고자 하는 마음, 내일 종말이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마지막 신앙의 불꽃을 살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