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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7 12:08
예수 그리스도 영성노트 45 이름의 영성
 글쓴이 : Ezra
조회 : 827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도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계속 그 이름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부르게 하기 때문에 신앙, 심리, 철학, 사회, 역사 등 여러 면에서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 후 첫 사람 아담에게 각종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 가를 보셨다(창2:28).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대한,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축복인 ‘정복하고 다스리라(창1:28)’라는 말씀과 관계되어 그 역할을 장차 그들에게 어떻게 행할 수 있는 가를 위한 보시기 위한 필수적 기반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어지거나 작명해 주는 이름은 창조, 통치의 하나님과의 관계, 대세상 관계 에 있어 우리가 성도로서 이땅에서 부득이 바른 의미와 역할에 분명하고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첫 사역 조건일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필자는 어떤 사람은 여자인데 부모가 아들만 선호해서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평생 남성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어떤 이름들은 마치 디아나(다이아나- 그리스 여신 이름), 또는 디나(야곱의 겁강당한 딸)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을 갖게 하는 이름도 있는 것을 본 일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기대가 높아서 특별하게 지어준 이름도 있으나 그 이름을 받은 자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해서 그 이름이 유명무실, 무의미 하게 되는 수도 없지 않다. 특히 카톨릭 문화권에서 “예수( Jesús )”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나(사제들이 지어준) 그들은 영적으로 예수님과 전혀 관계 없을 정도로 평범하거나 타락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례(영세) 받을 때 영적 새 이름을 받기 때문에 더 그런 경우가 빈번하다.

전술한 점들을 종합해 보면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나, 아무리 이름이 좋아도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사회나 자신을 위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점, 또 차라리 비록 부모에 의해 이름이 좋지 않게 지어졌어도 그 사람이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쓰임 받는 삶, 사회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훨씬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죄악 중에 전혀 이름에 관계 없이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역처럼 영적 이름을 주고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분명 매우 귀중한 사역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이름,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 실제로 함께 해주시는냐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정말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도 있으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은 새 이름도 주시며 또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사람의 이름도 귀히 쓰임을 받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 있음을 믿고 그 사역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그것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모범적 사역이기 때문에 더 당위적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도 언약을 통한 구속사와 관계된 역할을 할 중요한 사람들에는 직접 새 영적 이름을 부여해 주셨고(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렇게 대우하며 인도해 주셨다. 그 이름과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이름을 이름답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아브람(큰 아버지)이란 자체도 좋지만 영적으로 아브라함(만민의 아버지)란 이름, 특히 그 이름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성취될 수 있는 특권, 그래서 복의 근원자(너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는)의 이름을 받는다는 자체가 벌써 큰 은혜이고 본질적인 복인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이름을 주시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쓸모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구속사를 위해 귀히 쓰임 받을 사람의 좋은 모델로서 주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사역의 출발 시점이기 때문에 그래야 할 시기와 상징성도 없지 않다. 그래서 육신 세상적 이름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런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   
다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영적 이름뿐만 아니라 ‘호칭’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름 외에 자연스럽게 어떤 호칭(칭호)으로 불리우는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 사람의 어떠함을 인정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정당하다. 자기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인정해 주는 호칭이어야 의미도 있고 중요하다. 지금 당장 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불려지는 호칭은 더 그럴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귀한 장관으로 평가 받았다.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에게  “주”,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방백”이라는 말을 들었다. (창세기 영성노트 48-호칭의 영성 참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제 이름 값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종말로 치닫을 수록 더 엉망인(^^ - 특히 요즘 우리 사회.. 어디로 갈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어 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심지어는 이름 값을 할 만큼 공부도 했고 명성, 자격도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조금도 차이 없이 어떻게든 인위적으로라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너무 촉삭대는 자들도 많은 것 같다. 신앙인이 그렇다면.. 더 그렇다 아니할 수 있으랴.. 
진정한 이름 값과 정당한 호칭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당장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박수를 받고 빨리 큰 명성을 누릴지라도 더 시간이 지나 봐야 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는지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하도 세상이 어수선하니 웬만한 지도자도 결국 아닌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높히 평가하던 역사가들 조차도 결국 아닌 인간들이 많다. 잘 나가는 사관과 역사책들도.. 결국은 시간을 통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성경으로 검증된 것만 받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결국은 인류 역사 모든 것이 성경 한 권으로 다 이해, 평가, 심지어는 그 이유들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성경적 영성을 연구한다고 심지어는 성경 외의 카톨릭 교인과 기독교인들의 영성을 연구해 보았지만.. 결국 성경에서 말해주는 인물들의 영성만 연구해도 원리적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을 깨닫고 역시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야 했다. 
 
성경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런 점을 아시고 시대마다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 세우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이름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의 선하심으로(하나님의 선하신 이름에 순종할 때) 그들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런 각자의 이름도 복이되게 하시며 구속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점이 더 중요한 본질일 것이다.  심지어는 또 이 믿음의 유산의 신앙 세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리 언약과 예언으로 주시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해 주신 때에 반드시 이루어 짐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역사를 통해 선하신 섭리와 목적이 있으시고 때에 따라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그것을 신뢰 순종하는 것이 본질 임을 보여 준다. 처음부터 말씀에 순종했고, 말씀으로 온전히 이렇게 부흥했더라면(기본에 충실했더라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후기적인 우리 이방 민족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한 마디로, 그것을 직,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신 가장 분명한 결론은 역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길이실 뿐만 아니라, 모범이고 모델이다. 언젠가는 그 모델, 모범을 따라가야 비로소 참 구원과 성취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요즘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관해서는 잘 설교하지만.. 자신들이 설교하는 예수님은 따라가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사역의 의, 거룩, 완점하심을 온전히 나타내 주는 유일한 이름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구속주)님의 이름은 하나님께로부터 언약(창3:15)과 예언(마1:21)으로부터 온 것이다.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 등 호칭과 함께 간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예언된 것은 신약에서 오히려 구약으로 창3:15, 사7:14; 11:1; 미5:2절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경우 이렇게 출생 이전부터 성경 전체에서 이미 예언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죄인 인간의 구원과 참 생명의 사역을 위해 예수님이 그만큼 필요하신 분이라는 것, 창세기에서부터 우리 인간의 깊은 필요를 본질적으로 앞 서 아셨기에, 또 그만큼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보신다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와 관련된 이름은 직, 간접적 이름 등을 합해 성경 전체에 총 약 2,000회 이상 등장한다. 기타 예수님을 기다리는 책, 구약에서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단어들까지 포함하면 너무 많아서.. 그 이름을 빼면 성경이 아예 존재할 수 조차 없게 된다. 
 
그런데 그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처럼 이름을 중시하셨다는 것, 그것이 귀한 사역이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오래 전부터 이미 율법으로 “너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 )”고 명시해 주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 대신 다른 호칭들로 부른다. 모세가 출3장에서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리이까‘ 하고 물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m that l am)” 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주이시며 ‘이름을 주시는, 이름 이상의 분’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이름을 받는 존재들이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시점부터 그런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름을 꼭 알고 그것을 마치 인간과 동격처럼 사용하는 것은 주의할 대목이다.  또 출애굽기 20장에서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 이름을 각하, 무시, 과시, 이용하는 등의 잘못된 목적으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섬겨도 바르고 거룩하게 섬겨야 함을 알려준다.  최소한 아예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이름(하나님께 알려주신) 조차도 전혀 부르지도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부르지는 않더라도(그것도 또 다른 극단 -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주의해서 거룩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지 아예 부르지도 말라는 뜻은 아닌) 창조, 통치의 하나님을 존중하고 예배, 섬기는 목적으로 주의하며 거룩한 목적으로 경건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에 의해 언약과 예언으로 이름(죄인 구속의 이름 - 중보자로서의)이 주어졌으며 그 이름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 이름대로 사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셨고,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역시 그러한 뜻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세상 구원의 뜻을 위해 유용하게 쓰임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이 뜻은 또한 우리로부터 우리 후손들에게 그렇게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름으로 오셔서 섬기신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귀한 이름은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을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깊이 깨달을 수도, 또 성숙한 신앙 인격적 믿음만으로 관계할 수도 있을 뿐이다(예수 이름으로 본 관점에서). 또 그 이름의 능력으로 세상을 섬길 수도  있다. 그것은 좀 더 구체, 적극, 생산적으로 예수님의 모델, 모범처럼 그 이름을 받는 것, 받게 하는 사역의 영성으로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성경적 영성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역을 나누는 참 성도들은 직, 간접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현재, 또는 장래에도 그런 본질 차원의 영적 의미의 새 이름을 받는다. 예수님께 새 이름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시몬이 베드로가 되고, 사울이 바울이 되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마지막까지 좋은 모범을 보인 것은 성경 영성적으로도 그 뒤를 잇는 우리에게 의미가 깊다.  또 심지어는 요한계시록 2장의 버가모교회의 경우처럼 사단의 위 가운데 사는 최악의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들을 귀 있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영적전투 상황에서 이기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아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으리라 고 말씀하심, 또 사데 교회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온전치 못한 믿음을 유지하는 열악한 교회 환경 속에서도 합당한 삶을 살며 영적으로 소수의 이기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흰 옷을 입게 하고 또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시는 것, 또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교회에게는 장차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고 말씀 하시는 것은 이처럼 미래에도 그 이름이 헛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보증해 주시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하겠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이름을 망령되이(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넘어,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전파하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으로 헌신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 끝날까지 제자사역을 하는 사람들처럼… 적극, 창조적 영성을 위해 주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며 가르치고 훈련, 파송해 주시고 파송 후에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실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의 성숙한 헌신과 희생의 차원의, 더 적극, 생산적 영성, 그것이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영성의 모범의 중요성을 나타내 보여 주기 때문에 더 특별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