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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7 12:05
예수 그리스도 영성노트 44 - 예수님과 부활
 글쓴이 : Ezra
조회 : 6,475  
예수그리스도영성노트 44 - 예수님과 부활
김규식·2016년 4월 3일 일요일확인 20회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참 구원의 뜻이 이루어지는 가장 큰 절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셨어도 인류 구속을 위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 없었다면 의미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단순한 성탄절보다 더 중요한 절기로 볼 수도 없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절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로 생각 된다. 본제에서는 부활절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을 묵상해 보고 그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는가? 둘 중 어느 것이 맞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서의 입장에서 보는 요한복음서의 관점에서 보면 전자일 것이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승리를 선포한 것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할 것이다.
반면에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의 입장에서 보는 공관복음서들은 후자일 것이다. 특히 누가에 의하면 주님은 스스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처형당하신 것, 그리고 죽으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누가가 누가복음에 이어 계속 기록한 사도행전 2:24절 참조). 즉, 주님은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으신 주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다(롬8:11). 만일 스스로 부활할 가능성이 있어서 죽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죽음이라 할 수도 없다. 주님은 인류 구속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완전하게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인류구속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완전하게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또 그와 같이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이며(엡2:1)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신다.
다만 필자는 주님이 삼위일체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둘 다 맞고 둘 다 나름대로 의미 있다 생각한다.주님께서 처형당하시기를 좋아해서 처형당하신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처형을 모면하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다시 사실(부활) 능력이 없어서 처형당하신 것도 물론 아닌 것이다. 다만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원수들의 손에 맡긴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성도의 구속을 위한 온전한 희생 제물로 드리기 위함,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의 구속의 피의 공로로 인한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심인 것이다.
이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주님으로 인한 온전한 구원을 주시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차제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죽음과 부활의 최후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하고자 함이다. 물론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자신을 내어 주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영적 원리 자체는 변함 없는 것이다. 이런 깊은 사랑은 진정 사람을 변하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다.
이것은 바른 성경적 영성을 공부하고자 하는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같은 점에서 주님은 단순히 길, 진리, 생명이실 뿐만 아니라(요14:6), 모든 성도들의 모범, 모델(빌3:10-14; 히12:3)이시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구속함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속함을 받은 이후 주님을 따르는 성도로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최대의 긍정, 생산적 영성의 모범, 모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에 깃든 이러한 영적 정신을 우리 삶에 실천할 때 비로소 구원받은 성도로서 계속 이 땅에서 우리의 모범을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쓸모 있는(유용한) 영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성이 있어야 가정과 사회, 국가, 세상에 참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주님을 믿기는 좋아 하지만(하나님의 나라는 잘 구하지만..) 주님께서 모범, 모델로서 보여주신 길(그 나라의 의는..)을 따르기는 원치 않는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주님 나라의 의로운 길이 아니다(마6:33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같은 이유로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명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처럼 그 역할을 발휘하거나 어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쓸모 없는 이기적 종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주님께서 나(우리)를 위한 구속의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내가(우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아직 다른 사람들이 이 진리를 채 이해도, 받아 들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아직 핍박할 때.. 오히려 주님께서 당하셨던 고초와 인내를 기억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돌아 올 것을 믿고 계속 그들의 구원을 위한,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불하셨던 것과 같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다. 물론 부활이 사망의 덫을 깨뜨리는 것이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긍정적으로 주님으로부터의, 다른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의, 최종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택한 영적 방법에 의한 영적 승리, 그것이 후일 우리가 그 영적 최종 승리를 깨달은 이래 이런 방법으로 앞으로 계속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게 하는 귀한 능력의 도구가 된 점이다.
요11장에서의 나사로의 부활은 이런 면에서 주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의 부활은 다만 주님의 부활을 나타내고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이기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그러나 외경에 의하면 그는 부활 후에 주님의 원수들(장로들, 대제사장들, 사두개인들 등)에 의해 주님과 함께 살해 당할 것을 알고 다시 죽게 될 것을 알고 오히려 두려워 떨었으며 후일 다른 먼 나라로 이주하여 삶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 인류 구속을 위한 십자가를 지실 때 이미 자신이 죽으신 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실 것을 철저하게 믿고 계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벌써 마16:21절에서부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후로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으며 심지어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생각을 나타내신 시점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 시점은 베드로가 주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고 대답했고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6-19)’ 라고 말씀하신 그 때로부터인 것이다(마16:21).
세째, 주님의 부활은 교회론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음부의 권세(사망의)가 이기지 못할 것과, 그 교회에 천국 열쇠(복음 구원의)를 주시며 그것을 잘 활용할 것을 말씀하시는 부분, 요한계시록 1:20절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는 말씀은 주님의 부활(죽음에서의)이 단순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세상 구원을 위한 복음사역과 의미 있는 영적 삶의 권세와 사역적 면에서 매우 관계깊은 말씀이다.
한 마디로, 주님의 부활의 영적 의미는 믿는 자의 부활을 포함해서, 현세에서도 사단과 그 졸개들의 사망 권세의 위협과 복음사역 방해에도 불구하고 교회에게 세상 끝날, 땅 끝까지 강력하게 전파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며 그것을 도우실 것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마28:20). 계시록11장의 복음전파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 있는 두 증인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범에 마지막까지 최선 다하는 교회, 또는 성도의 모습이고 그것이야말로 교회 또는 성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이 아닐 수 없다. 
전술한 마16장에의 주님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출발해서 교회로 연결되며 18장까지 연결되는 부분은 매우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 부활만 있고 이전의 교회의 승리가 없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현세에서도 부활의 신앙, 영성으로 주님을 따르며 역설적 승리를 경험하는 신앙의 삶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1-24 - 제자도)’ 하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살도록 하고 있다. 그것은 성도된우리의 영원한 모범이며 또한 모델(언젠가는 우리도 반드시 그런 삶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대중사역으로부터 집중적인 소수의 정예 제자사역으로 전환된 것도 그 정도로 정신, 영적인 부분이 중요함을 말해 주는 같은 이유이다. 대중사역(대중설교, 치유, 축사)은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면 외형, 일시적인 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만일 부활도 전술한 면에서의 부활의 영적 정신의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나사로의 그것처럼 외형,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의 부활 속에 깃들어진 유형론적인 영적 모범은 오늘도 우리의 실제 삶 속에 계속 시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삶의 부분을 예루살렘과 로마로 간 바울의 삶도 결국은 주님의 모범, 모델의 길을 따른 것이다.
신자와 제자를 구별하는 것은 일면 무리가 없지 않은 일이나, 이제는 단지 교회만 출석하는 표면상의 출석 교인으로부터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육신적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성경적 영성의 신앙으로 전환하는 것 만이 그 일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이고 결국은 그것이 곧 산상수훈의 결론처럼 기름을 태워 어둔 세상을 밝히는,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고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마5:16)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