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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2-10 17:01
요한게시록영성노트 4- 이기는 자에 대한 묵상
 글쓴이 : Ezra
조회 : 3,824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대한 계시’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여 ‘소아시아의 7교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기는 자” 이며 이는 모두 8회(2:7,11,17,26; 3:5,12,21; 21:7) 나타난다. 거의 마지막 장에 결론적으로 사용된 21:7절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계2-3장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교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수신자는 소아시아의 7교회들, 계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 내용상 주인공은 예수님, 도우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이기는 자’에 대한 구절이 계2-3장에만 등장하는 것이 수신자가 같은 장들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교회들이기 때문 뿐만 아니라, 심각한 종말 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먼저 교회부터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치며 또 잘하고 있는 것은 격려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벧전4:7-19참조).

상식적으로, 의도에서부터 잘못된 길을 걷는 자들이 잘못한 것에 대한 심판이 있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잘 몰라서 또는 기타의 다른 이유들로 잘못되어 그것을 알려주고 수정해 주는 일은 그 일을 하시는 성령님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며 좋은 의도가 있는 분이신가를 깨닫게 한다. 교회는 최소한 자신이 알고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지 않는한, 마지막 순간까지 이러한 성령님으로부터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계시가 전체적인 종말과 심판의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성도된 우리에게 참되고 선한 것 임을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임을 말해 준다.

다음으로 그 계시 내용의 중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이시다. 성령께서 그 예수님의 구속 , 사역과 모범이 교회의 성도들의 삶에 마지막 종말까지 변함 없이 잘 이루어지도록 마지막까지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시종이 분명한 이 땅 역사의 주인공이신 이유는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구약과 신약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약은 참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책, 신약은 구약 예언의 성취인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이와 동시에 예수님으로 인해 온 세상이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심과 그 예수님이 이제 마지막 심판주로서 믿지 않는 자, 거부한 자 등에 대한 최후의 의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셔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영적 원리적으로 예수 중심의 신앙이 영육간의 모든 완전한 구원을 주시며 풍성함(요10:10)과 승리를 주시기(고전15: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사단과 그의 종자들이 역사하고 유물적으로 악한 세상의 도전을 받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롬8:37 – Nay,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ers through him that loved us - KJV). 그것은 요10:10절 말씀과 같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영생- 영원한 영적 생명) 뿐만 아니라, 또한 더욱 풍성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 생명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성령의 도우심 하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한 구원, 길, 진리, 생명되심(요14:6)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 모델이 적용된 예수중심적 신앙의 삶과 사역의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성육신적 실제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처럼 - 우리 인간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 세상의 악함, 원수의 시험, 초자연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 주님의 복음의 아름다움, 풍성(요10:10), 완전함의 크심을 삶과 사역에 적용하며 주님과 세상을 섬기는 사역의 차원에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시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심지어는 그것을 시기하고 시험, 공격하는 원수의 능력도 인내하며 참고 신앙으로 이김으로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기를 원하시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긍정, 생산, 더욱 성숙한 섬김의 종의 영성으로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과 세상을 섬김으로 유용하게 쓰임 받는 특권을 누리시기를 원하신다. 먼저 구원 받은 우리는 그 아름다운 주님의 복음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마28:18-19-재생산).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오늘도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제1중보자)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그 사역에 순종하고 사는 동안 세상 끝날까지 성령으로 (제2중보자-요14:16) 늘 함께 하시고 이끄실 것을 이미 말씀해 주셨고 그렇게 인도해 오셨다. 그러나 이 일에는 신약의 모든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종말에는 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각 개인이 각기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마25:31-34 양과 염소를 가르심)이 있음도 알고 벌써 그날이 가까왔음을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이러한 아름다운 본질에 최선, 충성하는 삶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말세는 특별한 상황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종말은 심지어는 구약성경 메시야론을 잘못 이해해서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해 버린 유대주의적 말세론과도 다르고, 구약 최후의 예언자들의 묵시론적 종말사상과도 다르며, 또 신약 예수님의 시대와 그 후의 성령의 폭발적 초자연적 역사가 있던 교회 부흥 시대와도 또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본질이 다르다기 보다는, 그 심도와 처한 상황 조건이 다르다. 부득이한 것이다.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해 주시고 도와 주시겠다는 말씀대신, 이제는 원수가 마지막으로 공격해 오는 마지막 때를 교회가 바른 신앙으로 여하히 치러내며 이겨야 할 것이 강조된다.

그것은 이전에 말했던 세계, 또는 나라를 달라고 거창한 것을 구하는 식의 선교 비전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종말시대는 이미 사단의 집중적인 그동안의 공격에 의해 기성 교회들이 이미 많이 망가진 상태이고 심지어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는 말씀처럼 믿는 자를 보기조차 힘든 상태로 전락하며 외부적으로 짐승같은 적그리스도들과 내부적으로 교회 내에 들어와 활동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성행하는 시대, 주님께서 속히 다시 오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위기의 시대이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보다 역설적으로 얼마나 순수한 성경적인 참 신앙을 잘 지키고 신앙의 본질적인 기준에 의해 인내하고 이기느냐는 자체가 오히려 종말 심판의 척도가 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주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신사적 빌라델비아교회의 모범- 필자는 이것이 소아시아의 7교회들 중 가장 본질에 충실한 모범으로 생각한다. 벧전 5:8절의,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헤메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항상 깨어 기도하라(눅21:25-36)”는 말씀의 시점이다.

이 종말계시의 말씀을 받은 자가 교회의 성도들이고 그들이 이런 환란의 종말 상황을 바른 성경적 신앙으로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마16장의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6) 후에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나님의 영-성령).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는 말씀에서 교회가 그 신앙의 터전 위에 서 있으면 비록 환란 속에서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참 신앙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도록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주시며 보증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마16장의 이 말씀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을 ‘주’(Lord­ – 왕, 주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으신-하나님의 도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함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은혜. (2)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창조와 동시에 통치의 하나님으로 인정함 (3)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자(人子-사람의 아들)와 구별되는 의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분류되는), (4)너는 ‘베드로’(반석 – 장차 그렇게 쓰임 받도록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주어진 영적 이름)라, 이 반석 위에’(반석같은 이러한 네 신앙고백 위에), (5)’내 교회를 세우리니’(예수님이 주인이신, 예수님을 구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교회를 예수님이 세우심), (6)’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사단과 그의 종자들의 권세가 예수님의 교회를 흔들고 공략하겠지만 이길 수 없음 – 영적전쟁에서의 보호, 교회에 대한 첫번째 보증), (7)’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천국 열쇠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목표가 지상에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나님의 통치권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를 세우는 것이고 교회가 그 사역을 하게 될 것을 의미), (8)’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이는 교회가 땅과 하늘나라를 잇는 중요한 영적 역할을 하게 될 것 의미)

그러나 전술한 바(빌라델비아교회)와 같이, 마16:16-18절 말씀을 전술한 종말의 상황과 조건 때문에 부득이 방법면에서 새롭게 적용해야 할 필요성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소아시아의 7교회들 가운데 주님께 칭찬 받는 교회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고 가난하며 가장 큰 환란 속에 있는 두 교회들(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이고 나머지는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을 처지에 있는 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칭찬 받은 두 교회도 장차 한 시험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라리라”(계2:10-11)는 말씀만 주어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는 최악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는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네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3:10-13 요약)는 말씀으로 종결된다. 이처럼 이 두 교회들이 유일하게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들 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최악의 종말적 시험 상황 속에서 더러는 그 중에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는 자가 있을 것,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참 순수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만이(일부) 생명의 면류관을 받거나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는 복을 받고 새 예루살렘과 주님의 이름을 그 위에 새김 받게 될 것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는 자”의 표현도 때(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아직 종말이 아니라면 롬8:37절 말씀과 같이 혹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더 많고 거창한 사역들을 이기는 방법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말의 상황은 다르다. 무엇보다 그럴 시간이 없다. 또 세계 전체적 상황이 그야말로 심판의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이미 사단과 그의 종자들이 세력을 곳곳에서 잡은 상태이고 제3차대전과 인류 멸망이 임박해 있는 최악의 상태,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을 멸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이기는 자, 이기는 그에게는” 등의 표현은 이전의 예수님 시대, 복음서 시대, 교회, 성령폭발 시대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에서의 상황은 모든 촛점이 참 신앙의 본질을 잘 지켰느냐 아니냐에 더 집중되기 때문에.. 그런 시대들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축소적(그러나 본질적)이다. 전체적 으로 마지막 시험을 잘 견디고 스스로 겸비하여 주님의 오심을 지혜롭게 예비하며 신앙의 참됨을 증명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종말적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자신을 겸비, 인내, 순수한 예수중심, 말씀중심 , 성령중심의 신앙으로 극복함으로써 그 신앙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종말시대에 요한계시록 본문이 요구하는 신앙의 특징이라 생각된다. 같은 이유로, 외형적으로는(육체, 물질, 일시적) 패배, 우겨쌈을 당하는 자 같으나, 영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런 환경을 신앙으로 잘 극복하고 신앙의 참됨을 인정받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단의 마지막 시험을 무력화 시키는 영적 차원에서의 이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내용상 더 옳다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박멸, 괴멸, 죽여버리고 이긴다(?)” 는 식의 적극적 사고는 오히려 상당한 오판, 또는 본질상 허황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마귀는 인간 육체처럼 죽지 않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지상 생애 기간동안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일이 없다. 다만 축사(쫓아 내심)하셨다. 눅 4:13절에 의하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예수님을 얼마 동안 떠났을 뿐 앞으로도 계속 예수님 사역을 방해할 것 -그것이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인 것이다. 요일3:8절에도 내가 온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자 함이라 하셨지 마귀를 없애 버리고자 함이라 하지는 않으셨다.
막5: 10절에서 는 귀신들린 광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먼저 예수님께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그리고 곧 12절에서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예수님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실 분인지를 알기 때문에 마귀도 스스로 움츠리며 그곳에서 당장 추방할 것을 면해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놀랍게도 그의 간청을 받아들이셨다. 다시 한 번 심판은 최후 종말 심판 시로 미루어진 것이다. 이유는 아직 종말의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그를 멸절하지 않아도(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으시지만)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능력(현세적, 일부적) 대신 진정 창조와 통치, 구속의 주를 믿고 의지하며 계속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능력의 도우심으로 마귀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장 마귀를 멸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최후 심판을 재림 시로 미루시고 지금은 그 마귀, 귀신의 능력에 사로잡혀 광인이 된 사람을 치유하시고 온전해진 그를 장차 주님을 믿고 그 지역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사역을 하게 하신 그 부분에 중점을 두신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김의 때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인한 이김의 본질적 방법의 우월함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그런 사역을 그 지역에서 그 귀신들을 상대로 한 영적전투에서 일시적, 육신, 외형적인 어떤 것 들 때문에 다시는 속거나 매이지 않으면서 그는 이 예수의 복음으로 자라갈 것이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이길 것이다. 그러한 일시적 이김은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이김”과 관계된 8구절들 가운데 마지막이며 같은 결론인 계 20:10절에서는 ‘그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는 최종적 이기심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것은 곧 성도가 예수님의, 오늘도 끊임 없이 도우시는 이기심에 의한 이김 뿐만 아니라, 사단과 그의 종자들고 함께 영원 불못으로 쳐넣은 최종적 승리로 확실하게 귀결될 것을 믿는 믿음과 인내로 이루어 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예수 중심의, 예수 복음으로 사단의 노예된 사람을 살리는 더 ‘긍정, 적극, 생산적 생명 사역에’ 더 의미를 둔, 종말 시대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의 신앙과 기도는 성경적 영성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서 기도는 단 3회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1) 5:8절(성도들의 기도), (2)6:9-11절(순교자들의 기도), (3)8:3- 4절(모든 성도들의 기도) 등. 여기에서 5:8절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인재앙(계6장) 직전에 드려지고 나서 하나님께 드려진 거문고와 향(성도의 기도들)이 가득한 금대접에 담겨진 후에 하나님의 세가지 심판인 ‘일곱 인(봉인)재앙’, ’일곱 나팔 재앙(8-9장)’,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16-18)’들 가운데 첫째인 인재앙(계6장)이 비로소 시작되게 하는 기도다. 그 기도들이 다 양을 채우고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나서 비로소 시작되는 본격적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의 심판으로 사단(마귀)와 그를 종자들, 그들을 따르는 타락한 사람들은 그들의 –완강한 저항과 발악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단이 잡히고 그 추종자들과 함께 영원히 타는 지옥불에 떨어 짐으로 구원사가 귀결된다. 단 3회 밖에 없는 기도들, 그러나 마침내 그 기도들이 구원사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기도야말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최종 승리의 비결이다.

‘인재앙’은 자연의 파괴(1/3)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각성과 회개의 마지막 기회로서의 간접적 심판이다. 사람에 대한 죽음을 가져오는 직접적 나팔재앙(8-9장)과 대접재앙(16-18장)에 앞 서 먼저 심각한 자연의 파괴를 통한 간접적 심판이 오는 이유는 그로인해 사람의 정상적 삶이 불가능하게 되는 영향을 주게 되고 혹 그로인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의 발 앞으로 무릎꿇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일 것이다.

기도들을 통해 재앙들이 ‘인재앙 – 나팔재앙 – 대접재앙’ 등 3단계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간접- 직접재앙, 특히 나팔재앙에서 각 단계마다 1/3씩 심판 됨(8:7,9,10,11,12; 9:15,18; 10:절 등 참조) 등의 으로 진행되는 것, 또 최종 심판 재앙인 진노의 일곱대접 재앙의 과정에서도 1-7단계까지 점진 심화되는 심판의 과정의 특징은 심판 중에도 마지막 긍휼, 회개를 위한 형벌의 유예(6:6), 또는 참 믿음을 가진 자들을 선별, 구원(9:4)하기 위함 임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하나님의 종말 심판 자체가 취소되거나 한계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이 기도들을 종말 심판에도 사용하신 다는 것이다.

성도의(들의) 기도에 대한 두번째 언급은 8장(일곱 나팔재앙)에서 본격적 재앙 시작 전에 또 반복된다. 여기에서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단에 드리고 그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고 나서(8:3-4) 다시 비로소 본격적인 나팔재앙 심판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6장의 성도의 기도와 8장의 성도들의 기도 역시 점진적으로 더 본격적으로 횟수도 많아졌고 금향로에 많은 향이 채워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종말의 자연 재난의 심판에 이어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 강팍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 성도가 얼마나 이를 위한 본격적인 최후의 기도를 더 집중적으로 드려야 할 것인 가를 보여 준다.

이외에 순교자(이미 순교당한 자들의)들의 기도(6:9-11)도 있다. 그들은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로서 하나님의 제단 아래 있던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이 큰 소리로 불러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두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기도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으로 잠시 지연된 것이므로 응답되는, 그들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최후 종말 심판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서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계심을 말해 준다. 이 역시 종말 심판을 위한 기도의 의미의 본질적 중요성을 말해 준다.
 
기타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행전에서 보이는 불같이 강림하고 능력으로 역사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습의 특별한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성령님도 이제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 종말을 준비하고 남은 시간동안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로서의 마지막 시대를 살도록 기도를 통해 마지막 계시의 성취만 남은 요한계시록에 주어진 말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마라나다(계22:20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기도는 이 모든 기도들의 최후의 기도이다. 주님이 오셔야(다시 오셔야) 하는 것, 이 말의 여러 의미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는 결정적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