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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0-10 08:59
출애굽기 영성노트 4 - 만나의 영성
 글쓴이 : Ezra
조회 : 4,920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할 때 애굽에서 갖고 나온 모든 음식이 다 떨어지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특별한 음식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음식을 먹으면서 광야생활 40년 후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육적 양식일 뿐만 아니라 깊은 영적 의미가 있는 영적 양식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백성들을 광야에서 친히 먹이심을 나타내며 공급, 보호, 인도의 영적 의미가 있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밀하게 자녀들의 가장 필요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아시며 채우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이 글에서는 영적 의미들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무색 무취하며 달콤하며 갓씨 같다 했다. 사람이 농사를 하거나 노력해서 얻은 음식을 먹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되지만, 특별한 경우(하나님을 바로 믿고 따르고자 출애굽하다보니-이것도 자신들이 바로의 학정 속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신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나온 모든 양식을 먹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다 갔을 때 결국은 자신의 것이 다 떨어졌으며 이제는 초자연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양식이 아니고는 안되는 상황에서 - 개인적으로 선교사 초기 경험) 기본적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 믿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하늘 음식을 내려 주신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이와 같은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상황에 따라 자비롭게 공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여러 기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은 영적으로 크게 유익한 깨달음이 되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승화되어 선한 일을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기초가 되므로 어둡고 죄악된 이 땅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정진해 갈 수 있는 오히려 힘이 되는 귀중한 것이다. .

2. 만나는 은혜로 주신 것이다.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며 자신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모든 음식이 다 떨어졌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은혜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신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위를 보고 사는 사람이며 하늘 위로 열린 은혜의 창을 통해 그 삶을 소망하고 그 은혜로 어둔 세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소망과 감사로 걷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광야로 인도받아 약속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광야에서라도 특별한 하늘 양식을 공급 받는 은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한 광야의 삶은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목표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1)하나님의 사람으로 광야로 나가사 신앙 훈련 받는 차원 - 기본적 수직 영적 관계 회복(엘리야), 좀 더 구체, 실제적인 신앙 교육 훈련(모세), 예수님처럼 시험에 합격하고 공생애(본격적 공적 사역 시대)를 위한 차원, 적어도 이스라엘의 출애굽처럼 그런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장차 원수들이 가득한 가나안 지역에서 신앙으로 그들을 상대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준비, 훈련하는 차원 등이 있다.

2)장차 더 큰 위대한 영적 사역을 할 지도자가 받는 훈련 차원(모세, 예수 그리스도 등) - 그것은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한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원하시는 삶을 그 분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며 사명, 소명자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자신의 염려, 걱정, 자존심, 자신의 삶을 그대로 기뻐 받으실 만한 산 제물로 드리는(롬12:1-2) 그 순간부터이다.

3. 만나는 신비하고 거룩한 것이었다.
인간이 사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특징이라면 무색, 무취라 할 것이다. 이는 인간 구속을 위해 자신의 오늘의 먹고 살 걱정을 초월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처럼 온전히 낮추시고 말없이 온순한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 가신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사53장).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 "세상의 떡"이라 말씀하셨다(요6:48). 만일 그것이 색깔이 기가 막히게 멋있고 맛도 좋고 냄새도 그런 것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물질적 외형에 취하여 보기만해도 그것 먹고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의 금단의 열매를 먹어 버리고 그것을 남자에게도 주어 함께 타락한 육체의 원인이 된 이브의 연약함처럼 하나님보다 실상 그런 것을 더 사모하는 부당한 불균형의 극단에 머무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관되어 오던 하나님의 신적 유물들(법궤,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모세의 지방이, 만나 등)이 오늘날 존재하지 않으면서 신비로 남은 것은 그것이 세상에 아예 없어짐으로써(혹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우상화되거나 물질로 유혹하는 극단적 역할을 하지 않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더 잘 된 일이다. 다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을 넘어 영적이며 비록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우습고 하찮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 분의 주시는 것, 그 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음식 먹는 행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감사함으로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만나가 내리는 시간- 안식일을 제외한 하루 한 번 새벽에) 허리 굽혀 절하며 그것을 줍고 감사하며 새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과 함께 매일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있는 험난한 광야에서도 그 분의 특별하신 영육간의 배려로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을 채우시며 영으로 더 풍성하게 하시는(요10:10) 살아계시고 좋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음식 자체도 그렇지만 오히려 그 보다는 만나와 함께 하는 과정이 있는 영적 삶이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만나는 신비롭고 거룩한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와 거룩이 늘 더 영적으로 성장, 성숙하게 한다.

4. 하루에 새벽에 한 번만 내린다.
만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안식일인 제 칠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하루에 한 번, 이른 새벽에 이슬처럼 하늘에서 내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적 원리는 하루(매일-one day based life)의 삶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몇 년, 몇 십년도 오늘 하루에서부터 출발하여 계속되므로 그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적어도 이런 영적 원리에 있어서 동일하게 살아가야 한다. 내일은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인간은 모르는 것이기에 먼저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넓게는 설령 어떤 사람이 오늘을 포기한다 할지라도 그 오늘은 예수님이 주시는 엄연한 전체 속의 하나로서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제 없는 오늘, 오늘 없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의 연속이 중요하다. 그것이 영성 세계에서 가장 실제적으로 확실하게 온전하고 겸손하며 완전함을 추구할 수 있는 기본이다. 그러므로 여건과 상황이 어떻든 주어진 내가(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오늘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본이다. 오늘의 삶을 중시하는 그런 차원에서 하루의 시작인 새벽의 의미도 당연히 중요한 것이다. 그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고자 겸손히 경배하며 시작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신선하고 아름다운 기본인 것이다.

5. 각 자 하루에 한 호멜씩만 거둔다.

만일 욕심이나 내일의 염려로 한 호멜보다 더 거두면 그것이 곳 썩어 장막에 심한 악취를 내는 구더기로 변했다.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양으로 아시고 주신 양보다 더 거두는 것은 참 신앙인으로서 그만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의 염려와 걱정에 빠지는 욕심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은혜 속에 살아도 늘 만족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때처럼 특별하신 영적 교훈 훈련과 준비를 목표로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런 상황을 허락하시는 때에도 여전히 이전의 구습의 모습으로 신앙이 아닌 인간적 모습으로 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거둔 음식의 양의 많고 적음을 초월해서 영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내일 일을 걱정하기에 오늘 하나라도 더 주워 모아놓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는 거지 근성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와 자세가 아니며 이보다 훨씬 좋으신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인 것이다. 자주 주변에서 그런 사람은 그것이 고쳐지고 성숙해 질 때까지 그런 식의 죄의 연관성(속박-consecuencia) 속에 발전은커녕 늘 계속 같은 자리에서 다람쥐 채바퀴 돌 듯 같은 과정을 맴돌면서 "하나님은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느냐,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느냐?"는 식으로 항의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더 큰 미래의 사역을 위해 지금 훈련하시기 원하신다. 또 "작은 일에도 착하고 충성되지 못한 자에게 어떻게 더 큰 일을 맡기겠느냐? 차라리 맡긴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겠노라"고 말씀하신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6:34)"라고 말씀하신 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은 같은 원리이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이것은(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만나)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절)" 사람의 내일 일(미래의 시간)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오직 창조, 주관자이시며 최소한 각 사람의 필요의 양을 아시고 매일 신실하게(하루도 거르지 않고) 허락하시고 몸소 매일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늘 문을 열어 신령한 음식을 내리시기 위해 봉사하시며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 안에서 연약한 개인(우리)을 허락하실 때에만 또 새로운 하루가 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차피 그것이 대신관계의 본질이고 그렇게 살 것, 욕심(혹 내일의 세상 염려와 걱정) 내려 놓고 이왕이면 지금 더 적극적으로 과연 어떻게 오늘을 멋지게 하나님과 함께 예배하며 시작하고 힘과 용기를 얻어 주어진 감사함으로 새벽에 일어나 예배하며 감사함으로 밤에 침상에 누울 수 있을까를 묵상함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 본문 결론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절)."

6.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
6일 째 되는 날에는 다음 날 안식일을 위하여 두 호멜씩 거두도록 허락하셨으며 대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안식일에도 나아가 만나를 구하러 들판을 헤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벌을 받았다. 전술한 것처럼 요는 우리가 구하는 육신적 양식 그 자체보다 먼저 하나님을 매일 아침 새벽에 예배하는 영적 삶이다. 오늘의 삶이 육신적 필요 자체만으로 가득하고 그것만 과제로 삼는 삶은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먹는 것? 그것은 좋으신 하나님이 모든 만물, 심지어 동물계에게까지도 이미 말씀으로 공급을 보장해주신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타락 이후의 죄의 결과로서 인간 만이 걱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주신 하나님의 동물계(생물계)에 대한 축복에 의하면 생육, 성장, 번성의 축복에 그것이 포함된다. 물론 1:28절의 사람에 대한 축복에서도 그것은 포함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목표는 최소한 단순한 생육(생존) 수준이 아닌, 번성(성장, 번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에 대한 축복은 여기에 지배와 통치가 추가 되며 그것이 사람이 동물(생물계)과 달리 만물의 영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중 금단의 열매를 범함으로(말씀 불순종) 그 축복이 제거되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으며 죽음이 임하고, 남자는 죽을 때까지 땀흘려 일하되 어렵게 나는 땅의 소출로 감사하며 살도록 하셨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과 남자를 주로 섬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는 일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인간들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매일 먹이시고 입히시며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의 백합화의 영광이 궁전에서 호위 호사하는 인간 솔로몬 왕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더 함을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런 죄의 사슬에 묶인 타락한 인간을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고 영적으로 회복되기 원하신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의 예언적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동물의 가죽옷(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피 흘리심의 희생 상징)을 해 입히시고 나름대로 족하고도 남을 만큼 오래 살도록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아담 930세 장수) 나름대로 영적 에덴의 삶(경배하는 삶-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삶)을 살도록 새롭게 길을 열어 주신 것이 바로 안식일의 영적 의미이며 복음(복된 소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안식일의 참 의미는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다가 자칫 흐트러져 영적으로 해이해져 다시 옛사람, 구습으로 돌아가 버리기 쉬운 사람을 돌아 가고자 하는 약점과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그렇게 되도록 유혹하는 사단으로부터 계속 충만, 풍성한 영적 생명의 자녀로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고 또 지난 한 주간 자신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보호,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 감사하며 영적 재충전을 한다는 의미도 있다 할 수 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몸소 쉬심의 모범을 보이며 쉼을 주신 것처럼 쉼의 의미도 있지만 전술한 적극적 의미들로 보면 가히 하나님 안에서 즐겁고 감사한 축제의 날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육신의 생일만큼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꼭 챙겨주기 원하면서 그 보다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엄청난 영적 생일은 기억조차 못하고 생일 축에 포함하지도 못하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무슨 영적인 자녀로 축복의 영성을 꿈꾸고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언어도단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술한 바 여러 예들과 같은 참된 영적 가치관과 우선 순위의 변화가 중요함을 볼 때 더욱 그렇다. 필자의 안식일의 영성에서 이미 충분히 깊이 있게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중략하고..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우리가 먼저 그런 영적 우선권(prioridad espiritual)을 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기타의 모든 필요들을 자연적으로 채우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의 그 분의 필요를 채우는 삶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것이 참 의미 있는 신앙 생활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7. 그러나 최소한 40년 간이나 내려 주셨(신)다.
만나는 한 번 내려 주시기 시작한 이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국하는 과정 40년 간 매일 변함 없이 내리며 하나님의 인내(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반역의 날들에도 최소한 만나 만큼은 매일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리시고)와 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보호 인도하시는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늘 신실하심을 보여 주신 부분이다.
이는 적어도 하나님과 그 사람 간의 가장 아름다운 최상의 행복인 영적 회복을 위해 하나님 편에서 최소한 그 백성의 최소한의 기본 생존을 위한 필요는 채우시며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시는 신사다우심(gentle - 인간의 말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어 이 정도로..), 신실(faithful)하신 하나님의 특성을 보심과, 또 사람이 최소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를 향한 선하신 목적을 바라보고 긍정적 신앙으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최소한 하나님은 육신의 양식과 관계되어 비판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성도로, 사역자로 선택된 어떤 신자의 삶에 아직도 매일의 삶에 계속 최소의 양식조차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런 현상은 분명 정상이 아니며 아마 또 다른 어떤 뜻이 계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다음 단계로 오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만나는 결코 값어치 없는 가벼운 것이나 공짜가 아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직 그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어떤 죄로 인한 막힘의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그가 여전히 너무 영적으로 물질주의에 치우쳐 하나님께서 교정하시기를 원하시는 시기이거나, 아니면 그가 도저히 그런 위치에 있을 만큼 인격적으로 천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더 큰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인간 자신을 완전히 낮추시는(모세가 40년 광야 훈련을 받은 것처럼) 어떤 특별하신 목적이 있으시고 그 과정을 통해 본인 스스로 비록 자존심이 완전히 상하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될지라도 그것이 그런 자신의 보통 인간적 모습을 넘어, 최소한 어떤 상황이든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모든 필요와 상황을 아시고도(전지), 또 도와 주실 수 있으시면서도(전능), 여전히 그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앞에 다만 온전히 인내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해결의 방법과 때를 기다리게 하는 훈련을 받게 하심으로 앞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비겁하지 않게 어떤 대가라도 당당하게 지불할 수 있는 제자(사도)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기시며 그를 순종하고 인내하며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는 종을 궁극적으로 축복하시고 그런 자(약하고 평범하고 제한된 인간이지만..)를 들어 어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쓰시기 위한 선한 목적에서 오는 연단의 때이기에(물론 그런 가운데도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극단적 필요는 당연히 채워질 것이다) 그럴 수도(?) 혹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무식하고 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이제 떡(만나) 이야기는 너무나 아름답게, 그러나 불가피하게 돌연 승화된다. 특히 그 속에 함축된 깊은 영적 의미는 장차 신약 시대의 최종의 영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깊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성령은 예수님을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 직전에 광야로 인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게 하고 육신적으로 곤하게 하셨으며 사단은 그 때 그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더 이상은 도저히 떡이 아니면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해 보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이 부분에 관한 사단의 시험을 충분히 이기셨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그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그 돌들을 떡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으셔서, 또 당장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광야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음을 몰라서도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굶어 죽더라도' 인간의 떡과 관계된 약점을 싸잡아 결국 사단의 유혹을 따라가게 만드는 악한 세속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보다 더 위대한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의 말씀(사람이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당연히 그런 것은 충분히 채워주실 것이고-마6:33)에 순종하는 것이 본질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일면 마치 육신이 굶어 죽더라도 영혼까지 팔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승화적 비약(trascendencia)이 있다. 육이 영이 되었다기 보다는 전술한 육신적인 면에서는 차라리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영이 굳이 성육신 하신다. 후일 "인자는 생명을 버릴 권리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제자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아낌없이 십자가로 향하실 - 누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뭐라하든 - 공생에 출발부터 보여지는 차원 높은 부딪힘의 긴장과 함께 할, 그러나 세상을 충분히 구원하실 분의 가장 지고의 영성의 일면을 벌써 보게 된다.

8. 만나는 더 이상 내리지 않는(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국 정착하여 농사 짓고 첫 열매를 거두자 비로소 만나가 내리는 것이 멈추었으며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 최소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말씀으로 선택받은 자녀들에 대한 인도 성취하심의 신실하심을 이루셨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부르신 당신의 종들(선민)을 전체적 삶의 과정들을 통해서(시작부터 완성까지) 말씀을 이루시는 순간까지 전술한 불가피한 영육간의 여러 필요 과제들을 도우시며 결국은 성취하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제 그런 육신의 양식 문제로 인해 훈련 받으면서 배우고 인내해야 할 시대(걸음마 - 초보 시대)로부터 청년기를 맞는 신앙인은 장차 다른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암시해 준다. 그것은 항상 먹고 사는 문제로 하나님을 의지하던 걸음마 단계의 유년기적 초보 영성에서 이제는 선과 악을 구분할 만하여 선을 택하고 그것을 지키고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며 목적이 이끄는 신앙의 달음박질을 할 수 있는 청장년의 영성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배운 것을 잘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영적 전투 현장에서 승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확장과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느헤미야의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식의 당당한 기도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재삼 깨닫게 된다. 이걸 도와 주시고 저건 저렇게 도와 주시고 그렇게 해 주시면 이렇게 하겠다는 식의 조건적(협상적) 내용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 늘 하나님이 함께 해오셨고 훈련해 오시고 해결해 주셨던 하나님이 지금 이전의 예레미야의 70년 이후에 고향 예루살렘 귀환의 말씀, 또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확실하게 받은 그 약속 성취와 사명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는 사역자의 정정당당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부모치고 자식이 예쁘고 겸손하긴 한데 뭐 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분야에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이 이루어지는 달음박질 경주에서만큼은 늘 쳐지고 "당신은 내게 왜 내가 어떻게 열심히 경주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도 않고 훈련도 시키지 않았나요?" 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혹 항상 1등은 못해도 최소한 믿음의 경주의 세계에 있어서도 뒷 줄보다는 앞 줄, 또 최소한 최선을 다해 사력을 다해 질주하고자 하는 자세와 당당한 결의가 있고 그것을 위해 끊임 없는 최선을 다하는 자녀이기를 원할 것이다. 꼭 일등을 해야하고 엄청난 일을 이루어야만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최소한 그래야 지금까지 한 교육이 의미와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감사한 것은 만나가 중단되었어도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으며 또 백성들 스스로 첫 해 농사를 지어 소출한 그 곡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직책만 주지 아니하시고 행할 능력도 주시는 분이시며, 또 감당 못할 시험 당할 때에 그것을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 즉 그의 사랑하는 종들의 장단점 위험한 순간들을 아시고 그 때마다 항상 선하신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이제 하나님 편에서의 그런 뜻 안에서 부름받은 사랑하시는 종들은 그들의 실제적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최소한의 기본 육신적 필요들에 대한 공급은물론, 가장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에서(롬8:28) 진정한 영적 필요들을 채우시며 마지막까지 인도하실 것이기에 그의 여생에서 마음껏 영적 사역에 매진할 수 있음을 믿고 당장 대소간의 어려운 문제들이 있든 없든 간에 첫 발부터 당당히 본질적 영적 교제와 작은 일에서부터 맡겨진 사역에 성숙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것에 삶의 우선권을 두고 임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설령 자신의 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 모세와 같은 삶을 마치게 될지라도(역설이지만) 필자는 모세보다는 큰 실수가 없었기에(?)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더 좋아하며 여호수아가 모세보다 훨씬 낫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논리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모세의 결정적 마지막 실수, 또 그 실수로 인한 개인적으로 가나안 땅 입국이 불허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모세이지만 최소한 성경 출애굽기 이후의 사건들인 여호수아 1장에서 5번 이상이나 문맥상 하나님께서 모세를 끝까지 그렇게만 생각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8절의 여호수아가 모세가 죽고 나서 차기 지도자가 되었으며 믿음으로 요단을 건너야 할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격려하시는 말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수1:2)",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1:3)",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1:5)",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취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1:7)"..., "그리하면 네가 형통하리라(1:8)" 등의 말씀들은 여호수아가 결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능력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역사(not only by history, but by chronology)로 볼 때 결코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나는 결코 모세처럼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거만한 마음으로부터 사역을 시작할 수 없었으며 그의 권위와 깊이 있는 영성이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자신의 사부이며 주인이었던 모세의 모범(최소한 그의 순수한 본질)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엉뚱한 내용으로 비약은 했지만 중요한 점은 최소한 여호수아도 모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면 형통하리라는 단순하며 분명한 진실의(autentica) 믿음의 영역(categoria)의 본질에 우리가 있으면서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과 함께 시작되는 크고 작은 실패들을 초월하여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결국 가나안까지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며 그러한 영적 자세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훌륭하게 쓰임 받는다는 사실이므로 우리가 그 보다 더 실패가 많았지만 결국 하나님도 인정하셨던 아브라함과 같은 기라성같은 위대한 신앙 선배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마치 자신이 최고라는 식으로 가서는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한 귀결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모세 후대에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결코 모든 것, 모든 사람이 다 시원찮은데 여호수아만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생을 마친 세대 이후의 후세들이 충분히 영적으로 성숙한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만은 더 더군다나 아닐 것이다. 특히 당시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의 여러 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지 못하고 주저 앉아 어설픈 정복으로 인한 대가를 장장 오늘까지 3천 년 이상의 비싼 대가 지불을 영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여러 영적 요인들을 종합해 보면서 특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함께 그 시대의 시공간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한 선하심과 성실하심의 크심의 본질, 거기에 순종해야 할 본문 내용의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9. 만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영구 보존된(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손들을 위한 신앙 교육상 법궤 옆 항아리에 넣어 두어 영구 보존토록 하였다. 상기한 내용들처럼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것이 진정 만나의 의미일진대 그것을 기억하고 배우며 실천하는 자의 삶은 당연히 큰 복이 된다. 그리고 그런 자의 삶은 시편23편의 다윗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밥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는 고백은 본문 만나의 영성을 체험하고 그 풍성함을 깨닫는 종들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아닐 수 없다.

법궤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임재의 상징으로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며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작하시고 글로 써서 모세에게 주신 두 개의 돌판(십계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라 명하신 만나가 들어 있었다. 이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체적 행동의 증거였던 물품들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또한 실천된 말씀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분이다. 신앙 교육에 너무나 본질, 상징적으로 도움되는 부분이기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들어왔지만 여전히 우리보다 더 강하고 우리를 공격하는 메뚜기같은 인간들을 조종하는 지역의 마귀들과 원수 사단을 향한 영적 전쟁에서 나름대로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필자도 그것들을 교회 교육상 실제로 만들어 사역하는 선교지 교회에 두고픈 생각이 든다.

10. 결론으로, 신앙생활에서 진정한 만나의 의미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내려주셨던 만나처럼 실제로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사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 분을 받아들여야(그 떡을 먹어야) 그 분의 은혜의 공로로 구속함을 얻는다. 그 은혜로 구속함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예수 안에서 풍성한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생명의 떡 논쟁(요6장)에서 유대인들을 그러한 예수님의 영적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조상들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며 그들이 모세(그리고 그와 함께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조상들의)의 후손임을 강조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조상들(만나를 먹은 조상들)은 먹고도 훗날 결국 다 죽었지만 생명의 떡인 자신을 떼고 먹는 자들은 영생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다.

상기한 내용들처럼 만나의 영성은 오늘날 광야같은 힘든 선교의 영적 전쟁 현실속에 배우고 성숙하며 주님 곧 오실 날을 준비해가야 할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영적 삶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표를 향해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최소 단위의, 그러나 어떤 부분이라도 이와 같은 신앙의 방법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참 아름답고 귀한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