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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0-01 08:50
창세기 영성노트 56 – 안식일 영성 II (창2:1-3)
 글쓴이 : Ezra
조회 : 7,919  
창세기 영성노트 56 – 안식일 영성 II (창2:1-3)



성경에서 안식의 원리는 ‘안식일(제7일)’"’안식년(7년)’"’희년(7x7년 다음 해)’ 등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더욱 확장된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이다.  안식일을 기준해서 보면 인생이 보인다. 최소한 50년이 안식의 원리에 의해 한 주기가 된다.  더 오래 살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안식의 원리는 계속된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언약(출31:13-17)이며 율법(출20:8-11)이다. 개인으로부터 민족 전체까지 안식일은 신앙의 터전(평생 지켜야할 원리로서), 율법(출20장 십계명의 제4계명), 사역(안식일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이방인들까지 해당)이며 성취이다(출19:5-6절의 “거룩한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민족 전체가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식일이 율법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유대인이 아니고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출애굽기의 율법으로서의 안식일 보다 창세기 2장의 은혜로서의 안식일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된다. 창세기에서 창세기2: 1-3절 밖에 되지 않아 얼핏 가볍게 지나치기쉽지만 영성으로 보면 이 부분이 오히려 에덴동산 자체보다 더 중요하며 그래서 성경 저자도 이를 에덴동산의 앞 부분에 위치해 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이것들은 대부분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실패했거나 기본적으로 그런 마인드 조차도 없었던 것들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 전에 이미 친히 세우시고 거룩하게 하며 복 주신 날임에도 성경적 안식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 하나님이 엿세동안 일(사역)하셨다.
 
여기에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 목표가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 특히 그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복이 모든 종류대로 창조된 피조물에게 임했다(22절-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라). 그리고.. 땅의 모든 짐승, 공중의 모든 새,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식물을 주셨고 사람에게는 특히 생육, 번성, 충만 외에도 ‘땅을 정복’하며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통치)’ 하셨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창조 행위를 통해 피조물에게 최대의 복이 되도록 선한 목적의 섬김의 차원에서 보여 주신 아름다운 모범을 통해 통치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지배하는 동물적 통치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 통치인 것이다. 통치의 시스템이 아닌, 통치자의 선한 의도, 목적의 아름다움, 완전함 때문에 복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 근원도 역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의도와 방법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미에서 성경의 통치는 본질상 민주주의나 어떤 구조적 통치가 아닌, 신정(神政)통치를 의미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단번에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쉽게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하나 창조의 매사에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며 이러한 창조의 정신 속에서 피조 세계가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수고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물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모든 피조물들, 더 나아가서는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창조와 주관자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진 모범을 다른 피조물들을 위한 통치에 잘 적용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분명 단순히 일하고 쉬는 것 자체보다 존중되어야 할,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영적원리로 볼 수 있다.
 
2.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이것은 하나님도 일하시는, 그래서 쉬시기도 하시는 분(?-^^), 또 일하심과 성취가 선하신 목적이 있는 일련의 과정(process)으로서의 일을 의미하므로 먼저 하나님 자신께서 이런 차원에서의 일(영적 사역)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 가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 역시 하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료해서 우발적으로 하신 일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 소원(꿈)이 있으시고 그 꿈을 이룰 계획을 세우시고 성취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냄으로써 전지전능의 능력을 무조건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수준에 맞게 낮추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영적 원리를 배워 삶에 적용하도록 하시는 목적이 있음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창조 전체 과정에 공들이신 사역을 “다 이루신 후” 안식(安息)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섬기고 사랑하며 세우기 위한 아름다운  목표가 있으신 하나님은 한 번 결심하시면 결코 대충하거나 하다가 중단함이 없으시며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그것을 이루실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의 사역의 완성은 먼저 하나님 자신께 ‘큰 기쁨’을 주고(“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31절) 하나님 자신을 거룩한 안식으로 누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의 사역과 관련된 하나님의 전체적 품성의 완전과 영원을 의미하며 잠시 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냥 평범한 일, 평범한 차원이 된다. 피곤하니까 쉬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그 주체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피곤하셔서 쉰 것이 아니라, 인격적, 선하심, 영원, 완전하신 삶과 사역의  모범을 따라 차제에 하나님과 세계를 섬길 사람에게도 같은 차원의 사역의 기쁨과 진정한 안식이 있도록 영적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니 다만 순종한다는 율법준수 의미에서의 안식은 실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조건 율법주의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성숙한 사랑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을 스스로 (인격도 없고, 성숙한 사랑의 정신도 없는) 다만 로봇처럼 기계화(또는 동물화) 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분명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술한 맥락들에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바가 결코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수준의 인간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물들에게도 다만 몽학선생이 될 뿐, 영원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정신, 특히 융통성있게 자신을 스스로 희생해서라도 사랑의 대상인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 승화할 수 있는 진정한 사역의 가능성을 막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의 이런 형식적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단호하고 강하게 비판하시며 경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피조물을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 과정에서 발견된다. 특히 사람에게 부족하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 먼저 천지, 바다, 식물, 동물 등 모든 좋은 조건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심, 그 사람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동물의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매일의 영적 교제와 세계를 섬길 수 있는 사역이 있는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신 것 등과 같은 세심한 고려(consideration)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고려를 죄짓고 죄의 연관성(consequence)과 함께 차라리 동식물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축복받기 위해 지어진 존재인데 그것도 모르고 타락하여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영적 각성 에 이르게 하며 그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며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의 긍정, 생산적 영성으로 회복하시고 이제는 우리를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 가족, 이웃, 동포 그리고 열방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재생산적(reproductive) 선교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보내 기회를 주시는(마28:18-20)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롬8:28절(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부름받아 사역자로 보냄받은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 이 사역을 감당할 때 주님의 특별하신 보호의 은총(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마28:20)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만세의 구원의 정신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소망의 사역 속에 어우러진 정신을 뒤늦게 깨닫고 감격 감사하게 되는 것도(엡1:4)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는 1)꿈꾸고 계획하는 단계, 2)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사역단계,  3)마침내는 그 꿈이 아름답게 성취되는 단계가 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면 그 일이 하나님의 열심과 성실로 반드시 이루어지고 결과적으로 안식도 하면서(주간 단위로)계속하게 하시고 또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것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큰 기쁨, 최후의 안식에 대한 소망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차원에서의 구령사역을 위한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게 보이는 일이지만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주어진 작은 것에 충성하며 대가를 지불하는 정신이 있는 종은 주님이 더욱 기뻐하시며 더 많은 것으로 베푸시는 것이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그래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라는 마25장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태도가 같은 의미에서 아예 처음부터(이해의 출발부터) 얼마나 잘못된 것이가는 본문 창2장에서부터 증명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정신 아래서 하나되는 영성차원이며 이러한 분명한 목적이 있는 차원에도 언약의 바른 윤리적 적용이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로서의 사역의 본질적 기초가 된다. 교인(사역자)이 되는보다 어떤 교인(사역자)이 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점은 분명 안식일이냐 주일이냐 논쟁을 초월하여 말씀을 통해 나타난 선하신 뜻에 순종하면 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선하고 좋은 계획, 열심히 땀흘려 하는 일이 기쁨을 가져오며 성취, 쉼을 제공해 준다는 개념은 이처럼 성경 창세기 1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처럼 사랑하는 자를 위한(소망) 기쁨의  최선의 섬김은 부담, 스트레스를 넘어 오히려 축복이며 이런 마음으로 하는 일은 건강에도 좋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좋은 결과의 복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일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영성의 세계에도 기본적으로 인간 자신의 한계성을 이해하면서 주어진 여건에서 감사와 기쁨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하나님도 원하시는 일이라 생각된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일의(사역의) 종류와 규모를 초월하여 그들이 있던 장소와 상황에서 여러 어려움들과 장애를 믿음으로 극복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 했던 소망과 믿음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그런 복된 삶의 결과가 후대의 우리에게도 모범이 되기에 어두운 오늘의 죄악의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고 감사와 기쁨으로 빛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전술한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의 정신을 깨닫을 때 비로소 가능해 진다.

또 그러한 창조의 정신을 깨달은 사람이 사역할 때 하나님의 안식의 원리는 자연스럽게 또한 그의 영육간 삶의 조화를 이루게 해 준다. 특히 하나님의 안식의 원리가 주간 단위로 한 주간 열심히 일하며 일에 매여 있던 가족들이 하루를 안식하며 창조주요 주관자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위한 은혜를 얻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께 한 주간의 보호와 인도하심 감사하며 열심히 일한 모든 결과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특권적 기회를 감사하며 주일 예배에 충실하게 된다. 최선 다해 노력했던 농부는 땀의 결실을 통해 막 수확한 곡식의 열매를 거두는 순간일 때 소망의 성취의 보람을 더 실감하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 기대감 속에 아름다운 결실을 바라보며 최선, 성실히 일해온 결과가 실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기 전에는 다만 소망에 불과했던 것이 일의 결과 소망의 결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일을 위한 일도 아니고 무슨 이득을 보기 위한 차원도 아니라 그 일이 가져올 상대방을 위한 아름다운 결과에 대한 기대와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니 나도(우리도)하는 것이다(요5:17).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동행하시며 인도해 오셨는지를 돌아 보는 것은 또한 새로운 감격과 위로가 된다.  하나님이 진정한 농부이시며(요15:1) 완전한 농부로서의 사랑, 신실, 인내의 모범은 연약, 한계적인 피조물 인간에게 우리도 ‘그의 사랑의 농부로서의 모범 안에서(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모범)’ 할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불어 넣어 준다.  안식의 기본적 의미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의 은혜를 깨달음에서 찾게 된다. 진정한 일과 안식 역시 모두 그것을 공평하고 충분하게 주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3. 하나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셨다”.

전술한 바와 같이 결국 안식일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인간-human-육적 휴식과 영적 재충전)을 위해 하나님 편에서 사람을 위해 제정해 주신 것이고 그러한 은혜의 구조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인간에게 모범을 보이시고 인간을 위하신 최대의 축복이 되는 방법인 안식일을 통해 최소한 공식적인 만남과 축복의 기회가 되도록 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 육신적 쉼 자체보다는 사람편에서의 어떤 이유로든 한 주간 동안 다소 소원하게 된 창조주 하나님과의 영적관계가 회복되며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축복하신 날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단순한 인간, 육신, 수단 방법, 물리적 일로 되돌아 가버리다 결국 아버지도 필요 없어 하던 탕자가 될 타락할 가능성을 막아 주시는 것이다. 한 주간 지배해 온 악한 정욕의 정신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능력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인간 육신의 능력을 지배하는 정신의 방법으로 우리 삶에 재 적용된 거룩한 재창조 사역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심, 그 날을 축복하심은 무엇보다 그날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만나며 예배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한 주간 대신, 대인, 대물 관계에 소홀했던 점, 실수한 부분, 더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부분들을 해결하는 일, 즉 예배로 시작한다. 이런 예배가 없으면.. 재생산은 고사하고.. 인간은 -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에덴 이상의 엄청난 온갖 외형적 축복을 맞게 될지라도..  결국은 또 추방과 함께 내적 저주로 얼룩지게 될 것이다.  차라리 이런 차원에서는 스스로라도 비록 에덴 안에 행운으로 들어가 있을지라도.. 장소를 초월해서(에덴 안, 에덴 밖이든 결국 인간은 인간일 뿐이기에..) 겸손히 영적 선악과 나무를 하나씩 끌어 안고서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출애굽기 20-8-11절의 십계명의 제4계명으로서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언약 형태의 모습으로 영성의 발전을 기약한다.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불가피한 도움이 필요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도움인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복잡하게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에 이어 하나님의 피조된 사랑의 대상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인 언약의 말씀 사역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한 사람은 말씀 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규례설명(출31:13-17)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이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백성의 증거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그것을 범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공식적인 선언의 날이 된 것이다.  선택할 사항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거룩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출19:5-6절의 이스라엘과의 언약에서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언약의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것을 안식일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시는 지를 좀 더 발전된 구체적 언약형태로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으로서의 안식일 규정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창세기에서 출발하여 출애굽기에서 구체적인 언약의 명령으로 주어지고 그것이 후에 계속 이스라엘의 모든 다양한 절기들의 형태로 발전되는 것은 안식일에서 모든 것이 영적으로 연결되고 발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일이다. 또 그것들이 영적 이스라엘 사회에 영, 육간 진정한 복지를 가져오는 기초를 제공했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배와 말씀생활에 이은 다음 단계는 확신컨대, 기도생활, 선교 생활이라 생각된다. 또 부득이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주의 날로 대치해서 지키게 되었는가, 주일은 안식일의 대치적 개념인가 아닌가 등을 다루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면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리고 차제에 다른 제목으로 더 구체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