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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6-16 06:04
창세기 영성노트 54 - 노아의 아들들에 대한 유언에서 보는 통치의 하나님에 관한 이해(창9:18-29)
 글쓴이 : Ezra
조회 : 8,648  
창세기 영성노트 54 - 노아의 아들들에 대한 유언에서 보는 통치의 하나님에 관한 이해(창9:18-29)



신존재에 대한 3가지 다른 입장은 1)유신론 2)불가지론 3)무신론이다. 유신론 입장에서 보면 불가지론은 역시 무신론과 가깝거나 같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은 안 믿는 사람들의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전혀 관계가 없으므로 범위에서 일단 제외하고 다만 유신론 내부에도 1)긍정(theism), 2)부정(소극적, 축소된 유신론), 자연신론(deism) 입장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 부분에 대해 묵상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유신론(theism)과 자연신론(deism)의 문제이다. 유신론 내부의 이 두 가지는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는 의미에서는 같지만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할 수 있다. 유신론(thesim) 입장에서 보면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자연신론(deism)의 “멀리 계신 하나님”과 대조적이다. 자연신론(deism)적 유신론 입장은 하나님은 계시지만 창조만 관여하시고 통치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개념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수적 개신교회들은 “창조의 하나님”, 동시에 또한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본다.

그러나 오늘날 인본주의적 사상이 가미된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이 팽배한 교회들 안에서는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 계신 하나님(통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 교회관과 반대되는 것이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하는 셈이 되며 이로 인한 피해는 오히려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자들의 그것보다 더 성경적 바른 신앙에 큰 해를 끼치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사상들은 기독교 내부에서의 바른 하나님 이해에 부정적으로 큰 해를 끼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사상들이 ‘특히 기독교 내부에서’ 모든 반기독교적 사상들이 일어나게 하거나, 기독교를 타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자연신(비 인격의)”, “사신(죽은)”,  “우주의 원리로서의(영지주의, 뉴에이지-영지주의와 유사)”, “실존론적 유신론(실존주의 시대의 인간 본성의 이기적 유산)”, “극단적 자유주의”, “보편신(pan-theism)”.. 등의 온갖 부정적 사상들이 여기에 기인한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려는 배경에는 잘 몰라서(잘 배운 일도 없으니까), 하나님 체험이 없어서(이론으로만 듣고 내 삶으로 실제 체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성숙하지 못해서(아직 미성숙해서) 또는 아직 보혜사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등의 이유들로 있을 수 있는 사고들의 유형으로도 보여 진다. 이런 상태의 신앙은 한마디로 미성숙한 것이며 대부분 지나치게(extreme) 감정적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이성적(이지적)인 유형들로 나타난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에 의해 학문의 자유가 주어지고 신의 구속(통치)에 대치되는 의미로서의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것을 신학에 도입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인본주의적 신학(관념론, 경험론, 실존론, .. 등)의 시대적 부산물로서 생각된다. 신앙을 이런 사상들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이해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그 이상의 하나님-통치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도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달라서 일단 현실에서 하나님을 “멀리계신 하나님(통치하지 않으시는)”으로 만들었고 성경적 하나님에 대한 인격, 실제, 영적, 역사적 특징이 제거, 또는 약화시켰고 그 결과, 신앙에서 하나님 통치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인 초자연적 역사(役事- 기적, 치유, 축귀 등)를 배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일찌기 오늘날처럼 이런 무신론적 유신론(?)이 활개를 치는 시대가 없었을 정도로 대 유행이고 나쁜 영향을 끼치는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무신론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신자들에 대한(신자들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고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가르치는) 책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성경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과 불신자들의 싸움만이 아니라, 소위 믿음의 자녀들이라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그런 무신론적 유신론(창조의 하나님만 믿는 사람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성경적 유신론(창조, 통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주장하는 양자간의 싸움이 기록된 책이며 후자의 문제가 더 심각함을 알려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창9:18-29절 말씀이라 생각된다.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온 가족들이 있는 집안에서 술취해 벗은 몸으로 누워 자는 부친의 수치를 가려주려는 아들들(셈, 야벳)과, 반대로 그 수치를 알려 그것을 다른 형제들에게 보임으로써 형제들간에 존재하던(형제들을 인위적 수단방법, 힘으로 물리치고 당시 가장 옥토였던 가나안을 독차지하던) 자신의 불의를 가리고 주도권(?)을 잡으려던 아들 함에 대한 노아의 마지막 유언에서 셈과 야벳의 후손들의 함의 후손(가나안)을 정복하고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리라는 예언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같은 신앙 집안의 자녀들이 서로 다른 대치되는 신앙의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부-자간, 형제간의 영적 전쟁, 행-불행으로 비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의하면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이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낳아주신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간에 서로의 약점을 감싸주고 고쳐 가면서라도(!) 긍정, 생산적으로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인드의 부재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을 저주한 노아의 마지막 예언적 유언이나, 또 그 내용이 후대에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구체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해도 그 점에 있음을 보여준다 생각된다. 예를 들면 창12장에서 하란에 머물고 있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이끄시고 그곳으로 그의 후손들이(이스라엘) 앞으로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번성하게 되리라 말씀해 주신 것, 또 그러나 그들이 먼저 애굽에서 4대를 바로를 섬기고 크게 되어 나올 것이며 그 이유는 이 가나안 땅에 아모리족속의 죄악 관영하도록 하기 위함(그들은 그런 죄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고 그런 자들은 결국 어떻게든 그들이 사는 땅을 죄악으로 물들게 하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임을 알려 주신것, 그리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기왕에 가나안에 살고 있던 자들을 모두 멸절하는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을 겪게 하시는 이유 등은 모두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가 혈육보다 선행하는 본질이고 그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축복의 근원 임을 말해준다.

죄로 인한 심판 후에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는 시점에 있는 한 신앙 가정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신앙윤리 문제에 관한 일에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 또 그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가 흥미로운 묵상 과제이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함께 나누고자 한다.

1)    대홍수심판 이후 노아의 세 아들들에 의해 세계가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다. 지금은 이미 에덴동산도, 의로운 신앙 형제 아벨을 죽이고 크게 번성하여 후대에 니므롯 제국을 이루었던 죄악의 가인의 후손들도 대홍수의 진흙으로 사라졌고 셋의 후손들(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 신앙의 아들들)이 남아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전처럼 역사가 진행된다면.. 아무리 좋은 자연적 조건의 환경을 주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실패하실 것이며 인간편에서도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 그랬듯이 그 이상의 영적 발전이 없는한, 그런 좋은 조건은 의미도 없을 것이다.

2)    그런데 이런 엄청난 중요한 순간에(!) 노아가 새 땅에서 시작한 포도 농사의 결실인 포도주를 마시고 가족들 앞에 술취에 벌거 벗은 몸으로 자고 있다.. 당시 원시 가족공동체적 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세상의 홍수 심판과 구원을 이끌어 온 영적 지도자, 모범적 신앙의 아버지로서 이것은 그야말로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잘해볼 가능성이 있던 가족 전체를 무시한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대단한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술과 방탕, 그것이 후일 바로 소돔과 고모라, 롯의 가문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던가. 그 단 한번의 실수로 졸지에.. 신앙 가족들 간에 문제가 생기고 영적 존재감, 존경 관계가 상실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특히 형(셈)을 무시하고 무력(인위적 수단방법)으로 가나안 최고 좋은 땅을 차지했을 정도로 아나무인이었던 미숙한 함에게는 형제들로부터 그로인해 자신에게 쏟아질 윤리적 비난을 이런 큰 실수를 한 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 씌우고 계속 자신의 육신적 주도권을 행사할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당신도 결국 똑같은 인간이네..) 형제들에게 그 모습을 보러 가자고 의도적으로 부추겼을 것이다.

3)    함의 말을 들은 형제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술취해 누워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러나(감사하게도!) 함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아비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 옷을 취해 어깨에 매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고 얼굴을 돌이켜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는 방법으로.. 놀라운 것은 이 행동하나로(symbolic하고 작게 보이는 것이었지만)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늦었지만 술에서 깬 아버지의 영적 바른 판단으로.. 세 아들들의 미래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셈과 야벳은 빛의 운명, 함과 그 자손(가나안)은 저주의 운명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함이 당장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죄책으로 당장 죽거나 멸망할만큼 극단적인 심각한 저주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최소한의 유사한 삶을 살면서도.. 그러나 결국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형제는 언젠가 그렇지 않은 다른 형제들을 섬기는 종이 된다는 것이다. 형(차남-함?)이지만 동생(삼남-야벳?) 민족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justice)의 하나님, 그 공의가 혈육보다 선행할 것을 의미한다.

지난 “창세기 영성노트 54 -노아와 세 아들의 영성”에서 밝힌 바와 같이 육신적 인간은 어느 누구도(부친이든 자식이든) 예수님이 아닌한, 불완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묵상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불완전(연약, 한계에 의한)함 속에서의 노아와 세 아들에 관한 본문의 내용에서 분명히 부친의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보다 더 악한 것은 그런 부모를 조롱하고 방종하는 죄가 더 큰 죄임을 말해 준다. 아울러 필연적으로 그런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한 가정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고 함께 세워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묵상해 보았다.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만 잘되면 그만이고 또 제 멋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문제다. 함의 삶이 그랬던 것이다.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었는데 아무도 그의 잘못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 대책이 없다. 그래서 “네 자손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예언은 단순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신앙의 고백이고 마지막 가르침인 셈인 면에서는 좋지만 신앙의 가정으로서 뭔가 더 잘해볼 수 있었는데 못한 것같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비단 구약의 하나님의 통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이기도 하다(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나라의 의(Justice of His Kingdom-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통치하시되 이런 분명한 원리와 함께 통치하신다. 선교지에서 현지인 목회를 하면서 복음전해 교회에 온 사람들끼리 아직 미숙해서.. 여전히 서로 시기하고 수단 방법을 사용해서 의도적으로 다른 형제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서(말해도 잘 듣지 않고..) 같은 이유로 마음의 깊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심정,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그들 수준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사실은 차라리 안믿는 사람만도 못한 것이라는 점도 부인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영접할 것이 아니라 그의 의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안되면 하나님의 복은 물론, 형제들간에도 혈육을 초월해서 문제만 일으키다가.. 형제의 종의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의, 통치의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는 같은 형제라도 섬기는 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통치 차원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지금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아프지만 큰 발견이라 볼 수 있다. 함 뿐만 아니라 아닌, 함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인 가나안,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은 이처럼 같은 아들들 가운데도 자신만 추구하고 부모와 형제까지 무시하는 사람은 그가 방금까지 구원방주에 의해 구원받은 신자라도 후손에게까지 죄책(consequence- 아비의 죄악이 후손 3-4대에까지)이 이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4)    그러나 그것은 또한 평소 가정에서의 바른 신앙교육의 중요성(물론 자신도 좋은 모범이 되면서..)을 말해 준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이 형제들을 무시하고 무력, 인간 수단방법으로 자신만을 위해 가나안 초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목소리크고, 힘센, 수단방법에 능하며 이기적인 작은 아들이 큰 아들을 무시한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진작에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원리로 바로 교육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함에 의해 자신의 실수로 술취해 벗은 모습이 드러나 조롱당한 후에야 뒤늦게 분노했다. 하지만 아들도 워낙 인간적으로 막돼먹은 인간이고 이미 자신도 큰 실수로 좋지 못한 모범을 보인터이라 말도 못하고 있다가.. 그것을 후일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으로나 겨우 남길 수 있었으니 이미 교육의 시기는 놓친 이후 였다.. 뒤늦게나마 하나님 말씀으로 예언적 유언을 남긴 노아의 행동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런 방법으로라도 드러나게 할 수는 있었지만 평소에 긍정, 생산적 모습으로 자식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같은 가족들 간에 사실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하나님의 크심의 긍정, 생산적이며 아름다운 위용을 평소에 느끼지 못하고 좋은 모범과 함께 진작 그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 그것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다.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차제에 우리 가족과 교회, 나라를 위해 어떤 더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더 세속주의자가 되고 거짓된 종북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신자와 교회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알고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가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할 것이다. 적어도 그런 자들이 끝까지 잘되었다라는 말은 들어 본 일이 없다. 그것은 창5장의 가인의 족보에서 드러난 일이다. 하나님은 창조 뿐만 아니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나를 위해 울지말고 먼저 너와 네 자식을 위해 울라.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