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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11 06:05
출애굽기 영성노트 41 – 종려나무 영성
 글쓴이 : Ezra
조회 : 4,812  
출애굽기 영성노트 41 – 종려나무 영성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15:27)

 
엘림 오아시스에 등장하는 종려나무는 학명 피닉스 닥티리퍼라(phoenix dactylifera)이다. 피닉스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 500-600년만에 한번씩 스스로 불 속에 뛰어 들어 타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전설의 새를 말하며 사철 푸른 나무 온, 열대 지방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야자수 나무의 일종이다. 생존, 생장력이 있고 열매도 많이 맺기 때문에 한번에 100kg 이상을 맺기도 하며 최대 30m 이상 자라서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들의 훌륭한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어디서나 잘 자라며 아름답기 때문에 오늘날 훌륭한 정원수들 가운데 하나이다.

나무는 뿌리, 줄기, 코파(Copa- 나무 가장 윗부분인 생장점) 등으로 구성되며 뿌리는 깊고(최대5m이상) 넓게 (최대30m이상) 퍼지는 특성이 있어서 바람 많고 건조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나무 자체가 높게 자라도 바람에 스스로 적응하며 흔들리거나 굽히면서도 잘 견디기 때문에 뽑혀 버리지 않는한, 부러지는 일은 거의 없다.

줄기는 가장 윗부분의 생장점이 있는 곳에서부터 계속 새 싹(잎)이 나서 시작되며 긴 것은 20m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윗부분의 줄기가 성장하면 차차 아랫부분의 줄기는 말라 죽거나 떨어뜨리면서 생장점이 있는 윗 부분에서 계속 새 싹이 나서 위로 성장면서 나무의 몸통이 되므로 나무의 줄기는 매우 튼튼하며 외부 피질은 딱딱하지만 내부는 부드럽고 상당한 유연성마저 갖고 있어서 바람에 이리저리 잘 흔들리면서도 높이 자라면서도 견딜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특이하다.

코파(생장점이 있는 부분)는 나무 가장 윗 부분에 있으며 계속 새싹들을 내고 그것들이 자라서 큰 나무잎을 이루어 위로 성장을 계속하는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이곳에는 잎사귀들, 재생산 조직, 성장눈(싹) 등이 있으며 어린 새싹(잎)들은 나무 상단에서 수직으로 위를 향해 성장한다. 이 부분은 이 계통(약200여 종, 2600여 개의 다른 나무들이 있는 야자수 계통–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까를로스 리나에우스 씨는 이를 식물계의 왕자로 명명했다) 나무들의 공통적인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부분이 살아 있어야 종려 나무가 아름다운 나무가지들이 제공하는 시원한 그늘과 아름답고 맛있는 열매들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만일 이 부분을 제거하면 아무리 뿌리와 줄기가 아직 살아 있어도.. 나무는 결국 죽어 버린다. 사람으로 말하면 머리 역할을 하는(사람은 성인이 되기까지 몸의 모든 부분이 생장하는 것이 다르지만)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종려나무는 본문 출애굽기 15장22-27절 말씀에 의하면 영적으로 엘림에 이르기 전에 홍해로부터 사흘 길을 걸어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이 마라(쓴 물이 있던)를 거쳐 종려나무 70주, 12 물샘이 있던 엘림 오아시스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엘림에 이르기 전에 먼저 마라의 경험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라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초입에 홍해로 부터 사흘동안 광야 길을 걸어 갔을 때 도착한 곳이다.
홍해-마라-엘림에 이르는 여정은 극과 극의 다른 환경들이고 영적으로 각기 다른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홍해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홍해 물을 가르고 이스라엘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들을 수장시킨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고 여호와께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으며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를 아름다운 시로 찬송하였으며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고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와 소고를 잡고 춤추며 여호아께 영광을 돌렸던 곳이다. 한마디로, 축제의 감격,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는 애굽에서의 유월절 어린양 피에 의한 구속의 경험은 곧 진정한 신앙의 시작, 그리고 그렇게 구원된 백성의 앞에는 이제부터 진정으로 환경이 어떻든 하나님께 예배하며(예배의 삶-출3:12) 하나님으로 부터 인도함 받는(배움, 동행 훈련)하며 살아가는 광야, 그러나 그 광야에서 창조와 통치의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도우시는 영적 광야의 여정이 있고 그것을 시기하는 바로(세상 권력자, 사단의 종의 대변자)가 죽이고자 추격,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보호와 인도(궁극적으로는 호렙을 통해 가나안으로 가는 목적이 있는)가 있는데 성도는 바로 이런 삶으로 초대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초대를 받고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을 본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드리게 된다.

마라는 하나님의 기적의 도움으로 홍해를 건넜고 한바탕 축제의 예배를 드린 후에(이것은 시작에 불과) 광야로 가는 여정이다. 먹고 마실 물로 없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최악의 광야길을(자신의 능력과 의를 의지하는 육신적 신앙을 죽이고 영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과정) 가야하는 것이다. 그 길을 가야 진정한 신앙인으로 영적 성장, 성숙하는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성도된 사람은 아직 이전의 모든 사고 방식과 죄된 육신적 삶을 그대로 살아서는 안되며 이제부터는 자신의 의(공로) 대신에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것도 이왕이면 확실하게 그런 과정을 배우고 경험할 수록 좋을 것이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죄악된 세상과 자신의 의의 피라밋을 하나씩 제거하며 다 무너뜨리고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은혜의 피라밋을 쌓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렵다고 그 과정을 외형적으로만 대충하고 내적으로는 믿기 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이 살아사는 마라의 경험처럼 오히려 낭패(쓴물-독[죽음)가 됨을 알려 준다. 홍해로부터 마라로 나아가는 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생활의 훌륭한 첫 걸음이 아닐 수 없다. 마라의 쓴 물의 경험은 이스라엘은 감정적으로 크게 실망하며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했지만.. 그게 그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왜? 최소한 기도할 수 있으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시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 최악의 환경, 한계적 인간의 어려움도 극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로 변화시키며 나아갈 수 있음을 배우고 경험해서 오히려 감사하고 성숙(지식[ 경험, 순종의 신앙)하게 되니까. 몰라서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해서 못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두려워서 못하던 것을 이런 본질적 훈련을 통해서 극복하게 되니까.

본문 말씀은 이 마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15:25)하시고 법도과 율례(15:26)를 베푸셨다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공식적인 율법은 출20장 이후에나 등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후의 율법의 원형(proto type)이며 근본 정신(spirit)으로 생각된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청종하고 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여호와 라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동행하실 대상자 축복의 근원이시라는 것이므로 당신의 방법으로 살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창2:4)이 여호와 라파(치료자)라는 것은 창2:4절의 말씀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타락해서 죄의 종, 사탄의 자식들이 된 자들을 이제 영적으로 치료하시겠다는 말이다. 즉,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그랬듯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지 않은 결과 죄의 구속(consequence)된 삶, 영적으로 찌들고 병든 상태에 이르른 사람을 다시 영적으로 말씀으로 치료하고 고치시며 회복하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율법과 율례의 목적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그냥 광야로 내몰아 죽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 영적으로 죄악에 구속되어 병들어 있는 상태의 사람을 그런 상황을 통해 말씀으로(법도와 율례로) 고치시고 다시 건강한 상태로 만들어 하나님의 본래 선하신 뜻(축복-창1:28) 가운데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쓴 물을 단물로 만드시는 기적, 물론 놀랍고 멋진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런 선하신 목적을 위해 쓰임받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 것이다. 그런 육신적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그런 극한 상황속에서 오히려 갓 태어난 유아 성도를 바로 기르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교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인 것을 깨닫고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돌아오고 그 분의 구체적인 사랑(말씀, 율법을 통한)의 방법에 순종하는 것과는 감히 비교도 불가할 정도로.. 말씀 중심의 순종의 삶은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마치 종려나무의 카파(머리부분)이 살아 있어서 계속 위로 성장해 가면서 광야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아름다운 열매를 제공할 수 있는 긍정, 생산적 참 신앙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된다. 

엘림은 이처럼 참 신앙 치료와 회복을 위한 광야같은 쉽지 않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말씀(법도와 율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위로와 격려의 증거일 것이다. 종종 성도들은(특히 초보의) 그런 마라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 너머에 머지않아 주어질 하나님의 아름다운 위로와 격려의 엘림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힘들어 하고..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 아닌 경험으로(!) 그 기쁨을 알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라는 것, 그것을 믿는 신앙 생활이 얼마나 역설적으로 기쁘고 더 의미있고 긍정, 생산적이라는 것을 알며 감사하며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오히려 지금이라도 빨리 뒤로 돌아가서 다시 애굽의 삶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기꺼이 순종해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렇지 못해서 늘 힘들어 하고 자신의 인간적 공로와 의로 가면서 하나님과 지도자를 원망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격려하면서 찬송하고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최악 상황 속에서도 찬송의 시를 읊으며(시23:4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바울은 빌3:7-12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난 의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하는 모습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 완전하고 성숙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가지를 물에 던져(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 상징)” 기적으로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충분히 목을 축이게 하고나서 다시 광야길을 계속한 후에 엘림 오아시스에 이르게 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은 마라의 약 10여 km 전방에 엘림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엘림에 도착한 후에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 떄 엘림 오아시스가 이렇게 가깝게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광야에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하지도, 지도자 모세를 불평하지 않았을 텐데..”

또 하나.. 종려나무로 부터 배우는 것은 그 나무가 워낙 한 줄기로만 높이 자라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에도 늘 이리저리 흔들리며(!) 있다는 것, 그리고 종려나무는 어떤 경우에도(특별한 천재지변, 사고가 아닌한) 아예 아주 심한 광풍(extreme)이 불어 나무가 아예 뿌리까지 뽑혀지지 않는한(성장한 종려나무는 그것조차 가능하지 않다) 최소한 나무가 부러져 쓰러져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나무가 뿌리를 깊이(5m이상)내리고, 뿌리가 실핏줄처럼 견고하게 널리 퍼져(10-30m) 내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나무의 유일한 줄기인 몸통전체가 겉은 견고한 피질로 둘러싸여 있지만.. 속은 대부분 부드럽고 유연성이 있어서 바람에 시달리며 잠시 기울어져 쓰러질 것처럼 보일 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나무는 굽힐 줄(겸손) 아는 것이다. 만일 높이 30m까지도 자라는 그 나무가 재질도 딱딱한데 바람을 경시하고 맞서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 높이에 강풍에(이런 저런 신앙생활을 시기하고 공격하는 원수로 인한 시련) 시달리며 결코 쉽게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생장점(코파)이 나무 최상단에 있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새싹을 내고 나무가지(종려나무 잎)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 또 그것을 위해 이미 자라서 밑에 있게 되는 가지들을 떨어뜨려 버리고 늘 바람과 태양에 대한 적응과 어려운 조건 속에에서의 성장에 최상의 조건을 만들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머리부분을 중시하는 삶(정신, 영적 삶의 중요성)이다. 생각하는 삶이다. 다른 나무들처럼 하다가는 생존도 못하고.. 아니면 생존은 겨우 하지만 유지에 불과할 뿐 성장, 성숙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전에 좋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목표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경주자처럼(!) 단순한 삶(SIMPLE LIFE)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무가 광야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 수 있고, 또 다른 어떤 곳에서라도 큰 어려움 없이 비교적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광야같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전진과 성장, 성숙을 계속하며 아름다운 그늘과 맛있는 열매를 맺어 순례자들에게 쉼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익한(!) 삶, 섬기는 삶의 모형,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의 모형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