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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17 08:47
창세기영성노트 52 – 야곱의 영성(5- 벧엘영성)
 글쓴이 : Ezra
조회 : 4,883  
창세기영성노트 52 – 야곱의 영성(5- 벧엘영성)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성경에서 성도에게 삶의 거처가 되는 장소 역시 항상 중요하다. 창조이래(창2장 에덴동산의 기원부터) 선하신 하나님은 성도가 거할 곳을 마련해 주시며 성도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인도해 주신다(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 적어도 불교나 유교처럼 공수레 공수거, 인생무상식 떠돌이 인생을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닌한, 내가 머무르는 이 장소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의 장소인가 아닌가, 또 에덴 밖, 가진 작은 것으로라도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살 것인지를 아는 일은 성도로서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해 주시는 땅에서 그저 인간적으로 잘먹고 잘 사는 것 외에, 그 이상의 영적사역(ministerio espiritual- 성도로서의 소금과 빛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성도는 최소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의 장소와 관련된 선하신 뜻을 부인하거나, 내가(우리가) 마치 하나님께 문제가 있어서 허무한 인생, 여러 어려움을 겪고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도 이미 이런 나를 버리고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다만 그와 같은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장소에서 축복받고 감사하며 받은 축복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창2장에서 하나님이 창조 후 아담과 이브를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아닌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신 것, 또 창12:1-3절에서 하란에 머물고 있던 아브람을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정하시고 인도하시는 장면은 장소와 관련하여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잘 반영하는 대표적 예이다. 창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삶의 구체적 장소와 관련된 자비와 은총으로 통치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형이상학이 아닌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점은, 벧엘(하나님의 집-창28:29)이 같은 의미에서 후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 장소였으며 야곱에게 그곳과 관련되어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때마다 3번이나 말씀하신 장소, 뿐만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며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신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일단 창세기에서의 야곱과 관련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창28:10-28절에서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 벧엘에서 돌베게를 베고 잠을 잘때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그곳이 하나님의 전이며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한 곳, (2)창31:13절에서 하란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곳, (3)창35:9-15절에서 21년 만에 다시 고향(벧엘)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시며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어 주신 곳이다.

일단 육신적으로 보더라도 야곱에게는 실제로 벧엘이 고향이고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벧엘은 조부 아브라함 시절에 하나님께서 하란에 살던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가나안 첫 땅 세겜 상수리 나무 아래서 첫 단을 쌓은 후 벧엘로 옮겨 정착한 첫 번째 장소라는 점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신 장소라는 의미가 단순히 야곱 개인의 육신적 고향 의미보다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곳이 하나님이 그의 조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영원한 약속의 땅으로 주셨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닌, 야곱이 결정한 장소라면 야곱이 후일 그곳이 실증날 때, 아니면 어떤 다른 인간적인 목표로 얼마든지 옮길 수도 있는 장소이겠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신 곳이기 때문에 어떤 사정으로든 아무리 그곳을 떠나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때문에(창31:13)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는 과정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삶과 이동에 있어서 좀 더 성숙, 신중해야 했고 이왕이면 그곳에서 좀 더 긍정, 생산적인 삶을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본질들 가운데 기본적으로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 인도하시고 세우시는 장소, 그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통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영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떠나면 패망과 실패뿐이고 그리고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야 비로소 회복되고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성취된다. 그것은 그 장소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존중(respect)함을 의미한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그것은 정녕 하나님께 삶의 목표를 맞춘 영적 삶이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삶의 거주하는 장소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 그 장소가 중요한 이유들의 하나는 야곱의 일생에 있어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후손들과 함께 시작된 족장사(patriaca-부족사)와 이스라엘사(국사-historia nacional)에 있어서의 벧엘의 중요성과 영적 의미이다. 그곳은 하나님 사역의 중심지, 복의 근원지이며 또한 회귀(regreso)의 목표이다. 한 사람의 부름받은 훌륭한 믿음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야곱같은 특별한 자손을 거쳐 족장사,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별난 야곱이 아브라함-이삭에 이은 3세대로서 결국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여러 자손을 낳아 족장사와 이스라엘을 가능케하는 시대들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야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만일 그런 그 야곱이 없었으면, 또 야곱처럼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하나에 불과한 사람들의 역사, 그러나 그 역사를 선하게 통치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아브라함의 족장사나 이스라엘은 물론 존재할 수 없고 또 하나님도 이스라엘과 관련된 선하신 일을 이루실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야곱의 많은 인간적 의도에 의한 시행착오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그 야곱을 다시 벧엘에 돌아오게 하시며 변화, 성숙시키시면서라도 다시 그곳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의 믿음의 자손들의 역사가 계속되게 하는 연결고리(은혜의) 역할을 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에 역시 그 이야기의 전체적 주인공은 너무나 인간적인 대표적 유형 야곱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그런 부족한 부분을 공유하는 모든 인간의 영적 필요와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의 잘못을 아시면서도 결국은 선하게 자비와 은총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통치의 하나님이시기에 야곱같은 부족한 사람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에 소망을 갖고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감사는 못할망정 당장 눈에 드러나는 인간 야곱의 인간적 행위의 치적이나 시행착오만을 전부인 것처럼 착각,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그를 죽이려는 에서의 추적을 피해 하란으로 도피하던 야곱은 하나님의 그 자비와 사랑의 통치 때문에 광야 벧엘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체험했고 그곳에 단을 쌓고 서원했으며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 그리고 도피한 장소인 하란의 삼촌 집에서의 21년 세월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에게 다시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창31:13)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올 때 벧엘에서 나타나 축복해 주시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어주시며 그를 통해 앞으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건설하시리라는 약속의 장소 (35:9-15)역시 벧엘이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벧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야곱은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의 시대에 야곱의 문제와 과제에 관련된 하나님의 지속적인 큰 틀 안에서의 인도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여느 다른, 그렇고 그런 사람들(예수님이 아닌한, 모든 인간은 불완전^^)같은, 인간 야곱의 미숙, 결점등으로 좀 별난 행보와 죄의 연관성(consecuencia)으로 인한 어려움은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술한 바와 같이 진정한 주인공이신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중단되었거나 망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그런 야곱이 하나님이 조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했던 땅(하란-길거리, 街道)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여러 부인들과 함께 여러 배다른 자식들을 낳고 그들 간에 서로 시기하고 다투며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로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로 후퇴한 것처럼 인간적 공로 사상만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과 한계, 불의를 가리는 가죽옷(창3:21- 대속의 피흘리고 죽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구속 상징)의, 인간 의의 한계를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하신 은혜의 사랑으로 흔들림 없이 인도해 가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본질)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생각된다.

그러나 벧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분적으로 인간적인 면모가 남아 인간적으로 살았던 신앙 아브라함의 가족에게는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회한(悔恨)이 깊이 서린 장소인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께 단 쌓고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신 그 땅 그곳에 잘 있었으면 궁극적으로 문제가 없었을 것을(있어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을)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든 간에.. 여차여차한 일로 그곳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갔다가.. 간곳에서 영적으로 혼쭐나고 실패해서 벧엘에 돌아오고 그리고 나서 좀 안정되다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또 헌신짝처럼 버리고 갔다가 또 간곳에서 실패하고 또 돌아오고하는 식의.. 그런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의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이 아직 영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순종하는 성숙한 차원이 아닌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엎어져도 잘되고 자빠져도 잘되는(?-부하게 되고 커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었다. 이삭도 그 아버지의 그늘 아래 비교적 큰 환란없이 안정된 삶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버지가 했던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까지는 비교적 안정적 부와 번영을 누리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3대 야곱의 대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된다. 조상들이 물려준 모든 부와 번영이 야곱의 대에 인간적인 모든 것은 다 유명무실해진다. 야곱은 죄짓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며 21년간 삼촌 라반 집에서 죽도록 노동하여 모은 재산도 결국 말년에 거듭되는 흉년과 자식들 문제로 다 까먹는 생으로 마감한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앙가문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과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인간적으로 얻었던 모든 것을 잃고라도..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진심으로 섬기며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을 믿는 참 겸손, 순수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그렇게 되었다. 환도뼈가 위골되어 불구는 되었어도 그가 직접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의 참 은총에 의한 삶의 신앙인,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위대한 도구로 쓰임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철저한 깨짐의 아픔은 후손들에게 하나의 진주조개의 결실같은 신앙의 유산을 전해 준것이다. 노년에 육신적으로 이미 노쇠했고 아직 과거의(?) 죄의 연관성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자손대에서라도 반드시 다시 하나님의 원하시는 땅 가나안 벧엘 귀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아내와 자신의 뼈를 자신의 고향에 묻어 달라고,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언젠가는 다시 그 땅(벧엘-하나님의 집)으로 돌아 가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그리하여 가나안 입국 후에 그들이 옮겨진 뼈가 묻힌 땅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된다. 그를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약속이 성취되는 영적보증이 있는 역사가 마침내 된 것이다. 후대에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은 그의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한 서린 기도가 마침내 응답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