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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작성일 : 20-04-04 09:25
김도명 목사님을 기리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16  
아버님 김도명 목사님을 기리며
김희성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1. 아버지로서의 김도명 목사님

1) 자녀들이 아플 때 극진히 보살피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자녀들이 감기에 걸려 코가 막히고 콧물이 흘러나올 때,
품에 안으시고 기도하시며 입으로 콧물을 빨아내시고,
또 눈병이 돌아 눈에 눈곱이 끼거나 눈에 티가 들어가서 괴로워 할 때
눈을 혀로 씻어주셨다.
국민학교 3학년 때 내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거의 죽어갈 무렵
아버님은 아픈 나를 안고 교회에 가셔서 철야 하시면서 낫기를 기도하셨다.
이러한 사랑을 몸으로 경험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자애로운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2)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대화가 되는 아버지

대학교 때 아버지께서는 제게 세례를 받으면 어떻겠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저는 아버지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지 않아서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신 할 때 세례를 받겠다고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이처럼 아버지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때를 기다리시는 분이셨다.

3) 멀리까지 배웅하시는 아버지

나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방학이 되면
지방에 있는 집에 내려가서 지내곤 했다.
개학 무렵 서울로 다시 올라갈 때
아버님은 언제나 기차역에까지 오셔서 배웅해 주셨다.
기차가 떠나기까지 서서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은근한 사랑이
가슴깊이 와 닿곤 했다.

4) 사회 정치적 관심도 불어넣어주시는 아버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그땐 교단 총회가 봄, 벗 꽃이 필 무렵에 열렸는데
아버지께서 총회에 참석차 서울에 올라오셔서 나를 데리고 수유리에 있는
4.19 기념탑으로 가서 독재에 항거하다가 숨진 젊은 영령들을 위로하며
분향하셨다.
아버님은 그런 의미있는 행동을 통하여 자유, 민주를 향한 의지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뇌리에 조용하게 각인시키셨다.

5) 화단과 채전을 가꾸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지방 교회로만 다니시며 목회를 하셨다.
가는 교회마다 화단을 제법 크게 만드시고 각종 꽃과 꽃나무를 심으셨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늘 화단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교회였고,
봄철로부터 가을까지 끊임없이 꽃이 펴서 웃음 짓고 있을 정도였다.
때로는 화단에 조그마한 연못도 만드셨다.
나는 거기에 물고기를 잡아넣어 기르기도 하였다.
또 채전을 가꾸셔서 야채, 상추, 쑥갓, 가지, 고추, 강낭콩, 마늘, 파, 호박 등은
늘 자급할 정도였다. 아마 경제적 도움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건강식품을
먹이시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2. 목회자로서의 김도명 목사님

1) 아들을 바치시는 아버지

중학교 일 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느닷없이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새벽예배에 데리고 가셨다.
새벽예배가 끝난 후에 아버님은 나를 데리고 교회 뒤에 있는
광산에 올라 가셨다.
그 산꼭대기에는 큰 바위들이 몇 개 있었다.
그 바위를 바라보며 그것이 굴러 내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던 바위였다.
아버님께서는 그 바위에 올라 가셔서 산 아래를 둘러 보셨다.
나도 아버님을 따라 둘러보았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아버님은 같이 기도하자고 하셨다.
기도를 하시는데 아버님은 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니 받아달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는 그 해에 내가 밀양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아마도 대견한(?) 아들을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바치시려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그 당시 이 기도의 의미를 몰랐다.
물론 이 기도가 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다만 아침 일찍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마냥 즐겁고
상쾌했다.

2) 시골로만 다니신 아버지

아버님은 시골교회에서만 목회를 하시겠다는 목회철학을 가지셨다.
김해제일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한번은 돈암정교회(현 돈암동교회)의
수석 장로님께서 내려오셔서 아버님을 초빙하려고 하셨는데도 가지 않으셨다.

그 후로는 김해제일교회에서 충남 예산군 삽교면 역리교회, 조치원교회,
경남의 밀양교회, 충남 서천의 길산교회를 거쳐 경기 화성의 하저교회에서
목회 중에 생을 마감하셨는데
이처럼 아버님은 지방으로만 전전하셨다.
그러한 목회철학의 배후에는 아마도 도시교회에서 목회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 데 구태여 거기에 가서 목회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자리했을 것이다.

3) 설교작성 때 엄청나게 집중하시는 아버지

설교를 작성하실 때 옆에서 우리 형제들이 장난치고 떠들고 싸우고 해도
아버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설교를 작성하신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여쭈어 보았다.
“옆에서 떠들면 설교 작성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아버지께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
정말 들리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면, 아버지께서는 한번쯤은
“시끄럽다”고 고함이라도 치셨을 법 한데
설교를 작성하실 때 그렇게 고함치는 일은 한번도 없으셨다.

4) 타교단과 교제를 좋아하신 아버지

꽃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아버님은 평화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타교단의 교회와 연합 사업도 하시고, 체육대회도 하시고,
부흥회나 사경회도 늘 참석하셔서 격려도 하시고 초대도 하시곤 하셨다.
체육대회에는 성당도 포함되었다.

5) 성자 같은 목회자

이러한 아버님은 교단의 다른 분들의 평에 의하면 성자 같은 분이셨다.
아버님은 시골교회로 다니셔서 이름은 나지 않으셨지만
 목회자로서 성공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6남매의 자녀들 가운데 절반이 목회자가 되었고,
아버님의 목회를 통하여 많은 목회자가 나왔기 때문이다.